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뒤… 마침내 붓끝에서 詩가 술술
서귀포가 극락이나 천당보다 훨씬 좋다는 이왈종. 꽃피는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게 요즘 일과 중 하나다. 뒤는 붓끝 모양의 섶섬. 서귀포=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그는 1990년 안식년을 받아 서귀포에 내려왔다. 그전까지는 서울에서 잘나가던 교수(추계 예술대)였다. 당시 그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격동의 시절이었다. 1989년 여름, 임수경이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다고 밀입북하고 중국에선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터졌다. 학생들은 걸개그림을 걸어놓고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모했다.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이왈종 자신도 도대체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밤에만 겨우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도 혈관확장증(1984년) 이후로 눈이 충혈돼 제대로 작업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행복이란 게 과연 뭐지? 어느 날 반야심경을 보는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이 가슴에 사무쳐왔다. 그건 ‘화론(畵論)’이었다. ‘그림은 틀에 얽매이면 안 된다. 마음 가는대로 그리면 된다.’ 그런 깨우침이 벼락처럼 가슴을 쳤다. 밥 세끼 먹고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한 5년만 실컷 그리다가 죽었으면, 그런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결국 안식년을 신청했고, 그 이듬해엔 아예 사표를 내고 서귀포에 주저앉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1남 1녀)은 대학졸업 때까지 아내(김예순·61)가 서울에서 뒷바라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독감이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뼈가 시렸다. 파리 한 마리가 화판 위로 날아가는데 그게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우선 서울부터 잊어야 했다. 일부러 부조작업(입체조각)을 하며 몸을 험하게 부렸다. 그러다보면 손도 다치고, 몸도 노곤해져 생각이 없어졌다. 틈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제주의 산과 들을 미친 듯이 쏘다니기도 했다. 자연은 신비로웠다. 꽃 중엔 너무 작아 돋보기 쓰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꽃도 있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 서울이 감쪽같이 잊혀졌다.
“서귀포 이웃에 ‘소라의 성’이라고 해물식당을 하는 세 살 위 김철우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과 하루에 세 번씩 만났다. 새벽 오름 산책길에서 보고, 점심때 그의 식당에서 그가 지어주는 밥을 함께 먹었다. 저녁엔 사우나에서 벌거벗고 하루의 일을 털어놓으며 서로 토닥토닥 위안을 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눴는데 그분이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눈을 감았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그 정이 뼈에 사무쳤다. 그분은 제주 토박이로 내 창작의 원동력이었다. 술도 못하고 노름도 못하고 잡기엔 전혀 무관심했다. 오직 꽃과 시만 이야기 했고, 한시를 외우고 여행을 즐겼다. 은둔의 철학자라고나 할까. 그분의 깊은 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돌아가신 뒤 초재부터 49재까지 해드렸다. 그때 쓸 향로가 맘에 안 들어, 그것도 직접 내가 만들었다. 수천만 원짜리 전기 가마를 사들여 만들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왈종은 스스로 ‘난 비주류, 3류였다’고 말한다. 그는 국전에 아홉 번 낙선했고, 1974년 문화공보부장관상 등 아홉 번 입선했다. 낙선 때마다 분노보다는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다닐 땐 서울 안국동에 화실을 내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학비를 벌었다. 고생깨나 했다. 그 후엔 그림만 그리고 싶어서 남대문시장 부근의 허름한 집을 사서 작업실을 냈다. 지게꾼, 날품팔이, 호객꾼, 칼바람 겨울날 궤짝 위에 사과 몇 알 놓고 파는 할머니, 별의별 풍경이 많았다. 그는 온종일 시장통을 왔다 갔다 하며 스케치하곤 했다. 그는 밑그림을 안 했다. 너무 정확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설프고 서툴러도 한번에 그리는 게 좋았다. 그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게 그림 소재였다. 만물은 서로 그물코처럼 얽혀 있다고 믿었다.
“골프그림은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나도 1998년부터 골프를 배웠는데 그때부터 3년 동안 나름대로 죽어라 습작을 했다. 골프는 인생이다. 해학이고 ‘Y담’이다. 골프를 치다보면 그 사람의 밑바닥부터 성장기까지 모든 것이 드러난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공이 벙커나 연못에 빠진다. 흔히 옛날 어르신들은 ‘물과 여자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골프도 마찬가지다. 난 80∼90타 정도 친다. 한땐 그 밑으로도 친 적 있지만 이젠 늙어서 안 된다. 춘화도 삶의 한 부분이다. 난 여자가 섹스를 주도하는 것으로 그린다. 여성을 씩씩하게 그린다. 남자는 주눅 들고 고개 숙인 모습이 많다. 여성이 하늘인 세상 아닌가. 물론 중년여성들의 몸엔 원숙한 삶이 녹아있다. 난 이발소그림을 그리더라도 가정을 책임지는 사람이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한다. 예술지상주의자는 피곤하고 싫다. 작가를 구속한다. 난 성공한 생활인일 뿐이다. 무슨 예술가 대접 받는 거 싫다. 단 자유인이다. 얽매이는 거 딱 질색이다. 내 그림이 화장실에 걸리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그림 팔자고 내 팔자다. 예술이고 자시고 따지고 싶지 않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작가는 모두 위대하다. 백남준, 김환기, 박수근, 김흥수, 장욱진 모두 그렇다. 그는 왈종미술관의 해설사들에게 ‘절대 그림설명을 하지 말라’고 한다. 보는 분들이 훨씬 잘 알기 때문이다. 다방 마담이나 음식점 주인이 손님이 뭐 시킬지 0.1초 만에 아는 것과 똑같다. 작가는 컬렉터를 넘어설 수 없다. 그분들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서귀포에 처음 정착할 때 ‘5년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 뒤는 전혀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은 1년 단위로 산다. 1년밖에 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면 애착이 없어진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는가. 돈, 여자, 작품… 그 무엇이든 소유한다는 건 고통이다. 난 다 내놓았다. 집도 절도 없다. 여기 왈종미술관도 문화재단이다. 2년 전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 유니세프판화전을 하고 있는데 살아있는 동안 필생의 업으로 하려 한다. 다문화가정, 불우청소년, 불우이웃 등도 돕고 싶다. 서귀포에 있는 꽃과 새들이 미술관을 지어줬다. 꽃은 혼자 보면 안 된다. 서울은 개인전 할 때라든지 1년에 5번이나 올라갈까 말까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 하기야 여기서 서울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다. 서귀포는 사계절 꽃피는 천국이다. 성산일출봉에서 산방산까지를 보통 서귀포 칠십리라고 하는 데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제주는 태풍을 봐야 비로소 그 속살을 알 수 있다. 태풍소식이 들리거든 얼른 와봐라. 무섭다. 모든 거 다 쓸어가 버린다. 그 뒤엔 영롱한 새 세상이 펼쳐진다. 태풍은 먹으로 그려야 으뜸이다. 색 쓰면 버린다. 난 무서운 그림, 우울하고 칙칙한 그림 싫다. 내가 행복하려면 그림도 밝고 따뜻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행복해진다. 우리미술관에 오면 다들 행복해한다. 천만다행이다. 난 작가보다는 ‘인간 이왈종이란 놈이 있었다’ 정도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엔 깊고 훌륭한 분이 많다. 난 너무 쓰레기다. 잡놈이다. 속물이다.”
▼ “시 한줄에 찌릿… ‘이걸 어떻게 그릴까’ 밤새도록 되새김질” ▼
그림보다 시를 더 좋아하는 화가
동네 단골식당의 양은 막걸리주전자에도 그의 익살스러운 그림이 ‘얼레리꼴레리!’ 웃고 있다.
“난 시집을 즐겨 읽는다. 시 한 줄 가지고 밤새도록 되새김질한다. 이걸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궁리하고 또 궁리한다. ‘한 줄도 길다’고 하지 않는가. ‘낮에는 모기들을 부처님이 등 뒤에 숨겨주고 있네!’(이싸) 일본 하이쿠지만 얼마나 좋은가. 바닷가를 어슬렁거릴 때면 이생진 시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성산포에서는/사람은 슬픔을 만들고/바다는 슬픔을 삼킨다/성산포에서는/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 세상엔 시가 안되는 게 없다. 밤하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지만, 내 눈에는 기류가 흘러가는 게 보인다. 며칠씩 그것만 생각한다. 시의 위대성…그 맛에 산다.”
“가끔 막걸리 한잔하고 그림을 그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을 느리고 길게 시조창으로 읊조린다. 참 좋다. 밝고 건강하다. 유심초의 ‘사랑이여’나 진도 ‘씻김굿소리’도 내 그림 작업의 길동무다. 장사익의 ‘찔레꽃’ ‘꽃구경’은 좋긴 좋은데 너무 절절하다. 미당 서정주 선생(1915∼2000)의 노래처럼 서운함이나 이별도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좀 섭섭한 듯만 했으면’ 좋겠다.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라면’ 괜찮겠다. 마침 미당 선생은 내 주례를 서 주신 분이다.”
이왈종은 그의 미술관 옥상 황토방에서 잔다. 2평 남짓이나 될까. 이름을 ‘중도관(中道觀)’이라고 붙였다. 붓끝 모양(문필봉)의 섶섬이 코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고, 뒤로는 한라산봉우리가 슬며시 굽어보고 있다. 황토방 앞에는 새들 먹으라고 사과조각을 남겨 놓았다. 방 머리맡엔 중국 당나라 구양순(557∼641), 명나라 동기창(1555∼1636) 등 명필들이 쓴 ‘반야심경 서첩’이 놓여있다.
이왈종은 틈만 나면 동기창의 반야심경 글씨를 보고 또 본다. 기름기가 하나도 없다. 우쭐대지 않고 수굿하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발 벗고 따라가도 어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그림보다 서체가 한 수 위다. 붓글씨는 단순하고 함축성이 있다. 표현의 기법도 다양하다. 대가들은 차원이 다르다. 추사 김정희가 죽기 직전 쓴 서울 봉은사 ‘板殿(판전)’ 현판 글씨가 그렇다. 사심이 하나도 없고,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았다. 자고로 예술은 이래야 한다.
“요즘엔 홍영수 시인의 노래에 빠져있다. 젊은 여인인 듯한데 시가 굉장히 깊고 슬프다. 애절하고 절절하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고 씩씩하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처럼/무수히 수놓지 않아도 좋아…//그저 책장에 오래된 일기장처럼/꿈이 살아있으면 좋겠어(내 꿈은)’ ‘마음에 싹 수두룩/잔뿌리를 내려도/손 흔드는 모습에 웃기만 하지//늦은 햇살 물 밖을 동동/붉은 등 돌리듯/그대는 떠나는구나(이별할 때)’.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어쩌면 사랑하는 누군가와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징징대지 않고 담담하다. 젊은 여인이 어쩜 그렇게 깊고 푸른 슬픔을 곰삭힐 수 있을까. 맑은 노래로 걸러낼 수 있을까. 나도 한번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서귀포=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이왈종 약력
♠국내 개인전 10회 ♠그룹전 ▽아시아 현대미술제(1975, 1982) ▽한국의 자연전(1979) ▽국제수묵화 명가 정선전(1988) ▽한국미술 오늘의 상황전(1990) ▽서울 현대한국화전(1991) ▽서울 국제현대미술제(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