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順命]권노갑 회고록‘국정농단’의 진실

입력 | 2014-04-05 03:00:00

이해찬 “당신이 權고문을 잘못봤다” 정동영에 충고




1988년 13대 총선 당시 권노갑 후보의 목포역 유세 장면. 찬조연설차 목포를 방문한 DJ가 연단 왼쪽에 앉아 있고, 앞에는 8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경호실장을 맡았던 김옥두 ‘동지’가 서있다. DJ 정권은 ‘동지들의 정권’이었다. 권노갑 고문 제공

○ 언론 플레이

그런데 (2000년 12월 2일 청와대 최고위원 회의) 다음날 정동영 의원의 발언내용이 여러 신문에 실렸다.

정 의원은 며칠 후 “비공개 약속은 아직 유효한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발뺌했지만, 한 기자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정 의원이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강을 건넌 뒤 다리를 없애버린다는 말이 있다. 정치에 입문할 때 그를 이끌어준 것도 나였고, 대변인이 될 때나 최고위원이 될 때나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준 것도 나였다. 그래서 가족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가 나를 밟고 올라선 것이다.

내가 배운 정치는 신의와 의리를 소중히 하는 것이었다. 밥 먹듯 신의를 저버리는 정치인은 국민과 역사 앞에 결코 떳떳할 수 없다. 나는 50년 가까이 정치를 해왔지만 단 한번도 누구를 배신한 적이 없다. 이념도 좋고 재주도 좋고 무엇도 좋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신의와 의리, 이것이 없으면 정치의 낭만은 사라지고 살벌한 대결만이 남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가치관은 이렇게 달라진 것인가 하고 서글픈 생각조차 들었다.

○ 비리와 인사개입에 대해

해가 바뀌어 2001년 1월 2일자의 어떤 신문에는 ‘뜨는 정동영, 저무는 권노갑’이라는 만평이 나왔다. 뜨는 것도 좋고 지는 것도 좋지만,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음해는 언젠가 시정될 날이 오는 법이라 생각했다.

정 의원은 시중의 루머에 빗대어 내가 공기업과 당정인사에 광범하게 개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국정을 다루는 장차관 등용에 개입한 일은 한번도 없다.

다만 당정간의 인사에 내가 관계했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을 뵈었다. 이때 나눈 이야기는 주로 당에 관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당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살피고 공천 때 자문역할을 하라”고 지시하셨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 계시므로 운신의 폭이 좁아 밖에 있는 나에게 당 문제를 당부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16대 총선의 공천과정에 개입하게 되었던 것이지, 다른 어떤 사심이 있어 소위 ‘저승사자’의 역할을 맡았던 것은 아니다.

○ 대통령에게 건의


16대 총선을 앞두고 세대교체 바람에 따라 내가 주저앉힌 출마 후보자만 줄잡아 30명이 넘었다.

공천 작업이 끝난 뒤, 나는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건의를 드렸다.

“이번 공천에 탈락한 분들은 모두 자기 지역구를 후진들에게 양보했습니다. 이런 의원들을 우리가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일 이들이 불만을 품고 버스를 대절해 지역구 당원들을 데리고 중앙당으로 몰려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들 가운데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사람이 나와도 곤란합니다. 그러니 이들을 불러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천 탈락자들의 모임인 ‘15회’(15대 국회의원 모임) 회원 26명이 청와대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뒤 “여러분이 어려운 결단을 해주었습니다. 당을 새롭게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여러분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낙천자들에게 정부 산하기관의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국회의원 말고도 당에는 정권을 창출할 때까지 30여 년간 고생해왔으나 당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자리를 잃어버린 당료 출신들도 20여 명에 달했다.

당시 대통령의 명에 따라 내가 인사에 관계한 범주는 오로지 정부 산하기관 자리뿐이었다. 그것도 세간에 소문이 난 것처럼 내가 직접 그들에게 자리를 준 것이 아니고, 단지 당료들을 잘 아는 내가 그들의 이력서를 청와대 비서실에 보내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다만 어떤 자리가 정해지면 그 결과를 전해 듣고, 대상자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해주는 것으로써 내 역할을 마감했을 뿐인데 이것이 와전되어 내가 국정을 농단한 사람처럼 세간에 소문이 났던 것이다.

실정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같은 내막은 당내 인사들 가운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공기업 인사에 권 최고위원이 관여했다고 하지만 4·13총선에서 낙천·낙선한 인사들을 무마하기 위한 당 차원의 역할이었고, 비리의혹도 제일 심했던 게 한빛사건과 동방금고사건이었으나 다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당시 이해찬 의원 언론 인터뷰)

이해찬 의원은 또 정 의원을 만나 “권 고문은 합리적인 분인데, 당신이 잘못 봤다”고 충고했고, 나중에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선 노무현 후보는 TV토론에서 “왜 노 후보는 민주당 정풍운동 때 권 고문을 비호했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것이 바람직스럽지 않아서 그랬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낙천한 동지들의 저항 ▼
설득하고… 다독이고… 權의 진짜 임무


어느 정권이나 대통령 임기 중 한번은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르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현직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띠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들을 내세워 새로운 신임을 얻고자 한다. 그러자면 ‘옛 동지’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김대중(DJ) 대통령에게는 2000년 16대 총선이 그랬다. 그런데 DJ에게 ‘옛 동지’는 누구랄 것 없이 민주화의 사선(死線)을 함께 헤쳐 온, 문자 그대로 ‘동지(同志)’였다. 그들이 DJ와 함께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어떤 헌신을 보여줬는지, 그 모든 이력을 전부 꿰차고 있는 사람은 권노갑 최고위원밖에 없었다.

예컨대 전남 강진-완도가 지역구인 김영진 의원은 농림수산 전문가로 DJ가 ‘모범적으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13대부터 15대까지 농수산위원회만 고집한, 당시까지만 해도 의정 사상 유일한 인물이었다. 권 최고위원은 김 의원을 만나 농림부장관 자리를 제안하며 지역구 포기를 설득했다. 강진-완도는 천용택 전 국가정보원장을 공천키로 내정돼 있었다. 물론 DJ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김 의원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세계기독교의원연맹(WCPA) 총재로 선출됐는데, 국회의원직을 어떻게 내놓느냐는 것이었다. 김 의원은 결국 비례대표로 정리됐다. 김 의원은 이후 노무현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게 된다.

김봉호 국회부의장(전남 해남-진도)에게도 농림부장관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국회의장을 노리던 김 부의장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권 최고위원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 부의장은 무소속 이정일 후보에게 지고 만다.

채영석 의원(전북 군산 갑·2006년 작고)은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 때부터 동고동락해온 동지였다. 13대 국회 때부터 원내 수석부총무를 맡아 소속 의원들이 배지를 달고 등원하는지, 본회의나 상임위원회에서 자리를 이탈하지는 않는지를 감독하던 ‘군기반장’이었다. 그 또한 DJ의 뜻에 따른 임무였다.

15대 국회 들어 재선인 한화갑 의원에게 원내총무를 맡기자 그는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권 최고위원도 미안했지만 DJ의 뜻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거기다 16대 공천에서는 물갈이 대상이 되고 말았으니…. 그에게는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이사장 자리가 주어졌다.

권 최고위원은 딱 한 사람 빼고 낙천자 모두에게 자리를 배려했다. ‘딱 한 사람’은 바로 국창근 의원(전남 담양-장성)이었다. 사실 DJ가 공천에서 탈락한 15대 현역 의원 26명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할 때 국 의원을 ‘콕 집어’ 했던 말이 있었다. “국 의원은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여유 있게 사는 편이니 (산하기관 배정) 순번에서 늦어지더라도 이해하게.”

그래도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 내정돼 있었는데 언론에 새나가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사정을 설명해 주고 다독이는 일도 권 최고위원의 몫이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