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 100인에 뽑힌 정유정 작가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내는 편지
소설가 정유정 씨가 산티아고 순례길 초입인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포즈를 취했다. 정유정 작가 제공
누군가 순례길의 첫 3분의 1은 ‘육체와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3분의 1은 정신과의 싸움, 세 번째는 영혼과의 싸움. 맞는 말이었다. 처음엔 몸이 힘들었다. 9kg짜리 배낭을 메고 하루 7시간을 걷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다음엔 ‘왜 이 길을 가는가’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었다. 그 일이 일어난 건, 끊임없이 완주 의지를 시험당하던 어느 날 오후였다. 숲 속 갈림길에 젊은 남자가 반바지를 훌렁 내린 채 서 있었다. 그러니까 스페인 산속에서 세상 어느 동네에나 있다는 ‘바바리맨’을 만난 것이었다. (스페인 바바리맨은 축구팀 유니폼을 입었다는 게 좀 달랐지만) 그의 등 뒤에 화살표가 있는 것 같았지만 확인할 틈이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올라(안녕)’, 하며 다가서는 바람에. 나는 “엄마”를 부르며 달아났다. 그는 ‘올라! 올라!’를 외치며 뒤따라 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엇비슷한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주변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머릿속 목소리만 시끄럽게 물어대고 있었다. 이봐. 노란 화살표, 어디 있어? 나는 걸음을 멈췄다. 없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와 깊은 골짜기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적도, 마을도 없었다. 어느 길로 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갈림길을 두어 개 더 지나고, 마을 하나를 통과하고, 국도 교차로를 지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시간은 저녁을 향해 가는데. 다리는 천근만근인데.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라고는 오렌지 한 알뿐인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정면에 저녁 해가 붉게 타고 있었다. 목적지인 산티아고는 서쪽에 있는 도시였다. 그러므로 저 붉은 해를 향해 걸어가야 했다.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났다. 지는 해를 안고 걸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찾아온 후엔 달을 등지고 걸었다.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쉼 없이 걸었다. 걷지 않으면 어디에도 닿지 못할 것이므로. 어느 마을에 도착한 건 밤 9시경이었다. 마을 입구에 그토록 찾던 노란 화살표가 기적처럼 빛나고 있었다.
모든 길은 가야만 끝이 난다. 그러니 가야 한다. 겁먹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똑바로 쳐다보며.
소설가·‘7년의 밤’ ‘28’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