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오피니언팀장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눈을 감은 채 몸을 살피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온다. 매복을 당한 느낌이다… 기습당한 군대의 장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후위 작전을 해야 하나, 이내 깨닫는다. 비유가 잘못되었음을. 이것은 싸움이 아니다. 죽음의 군사는 없다. 죽음은 실체가 없다. 목숨이 있을 뿐, 목숨이 끝나가는 것일 뿐.’
인터뷰 때 “치료 거부는 가족에겐 너무 이기적인 결정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어차피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무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책 속 주인공이 우는 딸을 바라보며 ‘아직 꿈을 꾸는 나이, 아직 이런 헤어짐을 몰라도 되는 나이… 애비는 그저 그것이 미안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작가의 마음이 읽혔다.
그는 주로 부자와 재벌 같은 우리 사회 주류를 편드는 주장을 폈지만 내면은 아웃사이더, 비주류 기질이 깊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4차례나 회사를 옮겼고 모 대기업 연수 첫날엔 “대졸 여사원과 고졸 남사원 임금이 왜 같으냐”고 항의하다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젊었을 적엔 혈기 왕성해 1960년대 말 국제사회를 뒤흔든 나이지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에 맞선 소수 민족을 구하려고 참전하기 위해 비자 발급까지 알아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혼 직후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지만 직장(연구소)을 그만두고 4년여 방안에 틀어박혀 역저 ‘비명을 찾아서’(1987년)를 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하지 않고 단행본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시절에 무명작가의 글을 당대 최고 문예지에서 책으로 출간하자 문단은 술렁였다.
촉망받던 소설가를 이념의 전사(戰士)로 만든 것은 시대였다. 그의 말대로 “‘박정희 개새끼’라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문단에서” 그는 자본주의와 부자를 옹호했고 노동조합을 비판했다. 그렇다고 우파가 그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오직 원고료만으로 먹고살겠다는 오기”와 “좌파들이 대접받는 시대에 편승하지 못하는 불운”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늘 빠듯했다.
그는 평생 지식을 탐구해 온 자신의 삶을 신작 소설에서 ‘뱃사람들에게서 얻어들은 토막 지식들로 먼 대륙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해 지도의 빈칸들을 메워가는 지도제작자’에 비유했다. 하지만 ‘세상은 허름한 지도제작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작가는 ‘(남들에게) 잊히고 기억되는 것이야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위엄을 지니고 죽음을 맞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정직하고 용감하게 살아온 진정한 지식인인 그의 생명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은 비단 기자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