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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문명]복거일 선생님, 오래 사세요

입력 | 2014-04-08 03:00:00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복거일 선생(68)의 신작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는 간암 판정을 받았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 치료를 거부한 남자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독백 형식의 글이지만 사실은 작가 자신의 독백이다. 최근 그를 만났을 때 기자는 그의 초연함에 놀랐지만 책 구석구석에는 ‘죽음’을 앞둔 작가의 내면이 배어 있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눈을 감은 채 몸을 살피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온다. 매복을 당한 느낌이다… 기습당한 군대의 장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후위 작전을 해야 하나, 이내 깨닫는다. 비유가 잘못되었음을. 이것은 싸움이 아니다. 죽음의 군사는 없다. 죽음은 실체가 없다. 목숨이 있을 뿐, 목숨이 끝나가는 것일 뿐.’

인터뷰 때 “치료 거부는 가족에겐 너무 이기적인 결정 아니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어차피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무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책 속 주인공이 우는 딸을 바라보며 ‘아직 꿈을 꾸는 나이, 아직 이런 헤어짐을 몰라도 되는 나이… 애비는 그저 그것이 미안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작가의 마음이 읽혔다.

자유주의자로 통하는 그는 종종 파격적인 주장으로 ‘이단적 지식인’이란 말까지 들었다. 대표적인 게 ‘영어공용화론’(1998년)이었다. 처음엔 맹비난을 받았지만 사교육에 따른 ‘영어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 현실이 되면서 이후 넓은 공감을 받았다. ‘성매매 금지법’ 비판이나 ‘이 땅에 진정한 친일파는 없었다’ 같은 주장도 처음엔 비판을 받다가 공감대를 넓힌 주제들이었다. 선생의 치밀한 논리와 통찰 덕분이기도 하지만 약자와 소수자, 심지어 변호할 기회조차 없이 산(生) 사람들로부터 단죄당하는 죽은 자들(친일파)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주로 부자와 재벌 같은 우리 사회 주류를 편드는 주장을 폈지만 내면은 아웃사이더, 비주류 기질이 깊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4차례나 회사를 옮겼고 모 대기업 연수 첫날엔 “대졸 여사원과 고졸 남사원 임금이 왜 같으냐”고 항의하다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젊었을 적엔 혈기 왕성해 1960년대 말 국제사회를 뒤흔든 나이지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에 맞선 소수 민족을 구하려고 참전하기 위해 비자 발급까지 알아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혼 직후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지만 직장(연구소)을 그만두고 4년여 방안에 틀어박혀 역저 ‘비명을 찾아서’(1987년)를 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하지 않고 단행본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시절에 무명작가의 글을 당대 최고 문예지에서 책으로 출간하자 문단은 술렁였다.

촉망받던 소설가를 이념의 전사(戰士)로 만든 것은 시대였다. 그의 말대로 “‘박정희 개새끼’라고 말하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문단에서” 그는 자본주의와 부자를 옹호했고 노동조합을 비판했다. 그렇다고 우파가 그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오직 원고료만으로 먹고살겠다는 오기”와 “좌파들이 대접받는 시대에 편승하지 못하는 불운”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늘 빠듯했다.

그는 평생 지식을 탐구해 온 자신의 삶을 신작 소설에서 ‘뱃사람들에게서 얻어들은 토막 지식들로 먼 대륙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해 지도의 빈칸들을 메워가는 지도제작자’에 비유했다. 하지만 ‘세상은 허름한 지도제작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작가는 ‘(남들에게) 잊히고 기억되는 것이야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위엄을 지니고 죽음을 맞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정직하고 용감하게 살아온 진정한 지식인인 그의 생명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은 비단 기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