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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호를 만나다]최수향 유네스코 국장

입력 | 2014-04-10 03:00:00

“돌다리 두드리며 건넜다면 여기까지 못왔다
작은 기회라도 모든것 걸면 더 큰 기회 온다”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최수향 박사에게 요즘 많은 20, 30대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그는 “국제기구 근무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헌신과 봉사의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며 “60%의 가능성만 보이면 40%의 불안함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그 길을 가라”고 조언한다. 파리=전승훈 특파원raphy@donga.com

그의 사무실은 깔끔했다. 책꽂이엔 서류 뭉치도 별로 없었다. “기마 민족처럼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마음 자세로 지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인 최수향 박사(54)는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파리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본부 국장에 오른 국제교육 전문가다. 그는 현재 평화교육, 글로벌시민교육, 지속가능개발교육을 총괄하는 부서를 맡고 있다.

성차별이 없는 유네스코에서도 고위직에는 여성이 부족한 ‘유리 천장’ 현상이 존재한다. 유네스코 전체 884명의 전문직 직원 중에 최 국장과 같은 국장급(D1) 여성 임원은 14명에 불과하다. ‘여성 1호를 만나다’ 시리즈로 인터뷰를 하자는 전화를 걸었을 때 최 국장은 손사래를 쳤다. “무슨 여성이냐. 그냥 인간이지. 여성이라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고 살아오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그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국제기구 공무원으로서 걸어온 길에 대해서 취재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인터뷰를 허락했다.

60%의 법칙… “그래, 한번 가보자”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1982년 가을 어느 날. 저녁을 먹고 TV를 보던 수향에게 당시 중앙대 교수였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수향아, 너 유학 가라.”

밑도 끝도 없이, 한마디 상의도 없던 제안이었다. 1980년대 초엔 대학 졸업한 여자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유학을 가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인생이 180도 바뀔 수 있는 결정인데, 수향은 선뜻 대답했다. “그래 보지요, 뭐.”

나이 서른 살.

캐나다 앨버타대에서 7년간의 공부 끝에 아동교육 심리학 박사학위를 땄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위 취득 후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자리를 찾던 그에게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계약직 연구원 제안이 들어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귀국인 데다 임시직 자리였다. 불안한 미래였지만 그는 주어진 기회에 모든 것을 던지기로 했다. “그래, 일단 해보자!”

이처럼 최 국장은 인생의 갈림길에 늘 60%의 가능성이 있으면, 과감히 기회를 잡았다. 40%의 불확실한 위험이 보여도 ‘일단,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교육개발원 경력은 유네스코 파견으로 이어졌고, 유네스코 정규 과장직 도전으로 이어졌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파키스탄 현장사무소 파견 권유를 받았을 때도 그는 불과 2초 만에 “예스”라고 대답했다. 파키스탄에서 얻은 6개월간의 현장 경험은 그 후 짐바브웨 현장사무소에서 국장급으로 승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최 국장은 “100% 가능성까지 다 두들겨 보고 안전한 길만 택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회를 잡아 능력을 보여주면, 또다시 새로운 기회가 오곤 했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국제협력에 큰 관심이 없던 시절. 그는 “한국 여성으로서 국제기구 임원이 되기까지는 주위의 수많은 디딤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더 높이 날 수 있을 거야”

그에게 첫 번째 디딤돌을 놔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해외에서 일하는 데 가장 필요한 언어능력을 키워준 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맏딸 수향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주한미군 영어방송(AFKN)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딸 방에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군용 라디오를 사줄 정도였다.

1993년에 한국교육개발원에 임시계약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이 된 결정적인 계기도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그는 4년간 국제협력 담당자로 일하던 중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젊은 전문가 파견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전공이었던 영유아교육 분야 전문가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견을 보내는 기관에서 월급과 체재비를 다 대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는 상사를 찾아가 “이거 꼭 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사였던 성경희 박사가 해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최 박사, 내가 보니까 당신은 날개만 달아주면 더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야.”

최 국장은 앞날을 내다보는 선배의 배려로 1997년 9월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로 파견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 정착한 지 한두 달이나 지났을까.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한국에서 송금해 오는 돈은 점점 휴지 조각이 됐다. 상황은 악화돼 6개월도 못 돼 돌아가야 할 위기에 처했다.

탈출구는 뜻밖의 곳에서 열렸다. 당시 유네스코 상사였던 영유아가정교육과 과장이 “12월에 퇴직한다”는 것이었다. 태스크포스에서 함께 일했던 유네스코 임원이 최 국장의 일솜씨를 눈여겨보고 과장직에 지원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회의에서 복잡하고 장황한 토론을 한두 마디 핵심사항으로 정리해 내는 최 국장의 능력이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최 국장은 유네스코에서 새로운 디딤돌을 만나 10개월 만에 파견직 신분에서 유네스코 본부의 정식 과장이 됐다. 최 국장은 “그동안 내가 받은 게 많다 보니, 나도 매니저가 된 후 가능성 있는 후배를 키워주는 일에서 보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최근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현장사무소에서 일할 때 자신이 기회를 줬던 현지 직원이 유네스코 인터내셔널 정식 스태프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그 직원은 워낙 일솜씨가 똑 부러졌다. 그가 없으면 현장사무소의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는데도, 최 국장은 그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파견 기회를 주선해줬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날개만 달아주면,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내 상사가 날개를 달아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다.”

불이익이 온다 해도 ‘직언’하라

최 국장의 어릴 적 별명은 ‘독일병정’이었다고 한다. 어떤 상황이 와도 감정 표시를 잘 안 하고,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생활습관이 규칙적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다. 최 국장은 “어릴 적부터 규칙을 지키는 데서 무한한 자유와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생활태도는 국제기구 임원으로서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원칙은 ‘공정함’이었다. 최 국장은 “리더는 인기를 얻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아랫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공정하지 않다는 평가는 내겐 큰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상사에게도 틀린 점이 있으면 직언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런 최 국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사익을 추구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심지어 유네스코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부서가 비효율적이라고 해체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목을 내놓고 한 직언은 조직 내 그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현장사무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할 때도 그는 구조개혁 작업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직원을 해고해야 할 일도 생기고, 협박도 받게 됐다. 이상한 것은 협박을 받을 때마다 집에 가면 밤에 두 발 뻗고 잠을 잘 잤다는 것이다.

“협박을 받으니까 가슴은 좀 떨렸죠. 그런데 잠을 푹 잔 건 내 속마음에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만일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비겁하게 굴었다면 남이 손가락질 안 해도 거울에 비춰 보면 다 나와요. 그렇게 괴로운 게 없죠.”

그의 담백한 내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 국장은 어릴 적 아버지가 마루에 걸어놨던 글귀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다고 했다. ‘부쟁이선승(不爭而善勝)’, 즉 ‘선(善)은 싸우지 않아도 이긴다’는 말이었다.

국제기구에서 주목받는 한국의 경험

최 국장이 17년 전 유네스코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인 직원은 4∼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턴까지 합치면 수십 명을 헤아린다. 최 국장은 “한국 직원들은 언어능력도 훌륭하지만, 요점을 정리할 줄 아는 개념적 사고가 좋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한국 교육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밖에서 보면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단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실시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이 우수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최 국장은 “한국은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누구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는 전반적인 교육 성취도가 높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원조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한국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최 국장을 신나게 만든다.

한국은 2009년에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멤버가 됐지만, 서구 국가에 비교하면 여전히 마이너리그다. 그러나 어떤 선진국도 줄 수 없는 것이 단 하나 있다. 그것은 돈이 아니다. 최 국장은 “아프리카 많은 저개발 국가들은 한국의 돈보다도 전쟁의 폐허에서 짧은 시간에 일어난 독특한 개발 경험을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시찰을 갔다 온 아프리카의 한 장관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한국에서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수없이 견학했지만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뭔 줄 아느냐고 제게 묻더군요. 뭐냐고 물었더니 1주일간 한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니 벌써 회의 때 요청했던 답변 자료가 놓여 있던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신속한 일처리가 한국이 이룬 기적의 원동력임을 실감했다고 했어요.”

▽약력
△1960년 서울 출생
△1982년 중앙대 심리학과 졸업
△1990년 캐나다 앨버타대 교육심리학 철학박사
△1997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 파견
△1998∼2006년 유네스코 본부 영유아교육, 중등교육, 직업교육, 현장지원과 과장
△2007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현장사무소 부소장격 파견
△200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 현장사무소 소장
△2010년 유네스코 본부 현장지원국 부국장
△2012년∼현재 유네스코 본부 평화·지속성장개발 교육국장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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