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도쿄 특파원
일본 국민은 한국에 언제까지 사죄를 되풀이해야 하냐면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과거사 문제를 이용해 일본 이지메(왕따)에 나서고 있다는 불만도 가득하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도 일본은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출범시키는 등 할 만큼 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일본의 많은 양심세력은 생활이 어려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아시아여성기금에 적극 관여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사회당 당수가 일본 총리가 된 틈에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사죄라면 제대로 된 사죄라고 하기 어렵다. 게다가 사죄를 해도 곧이어 이를 뒤엎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은 사죄의 진정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가슴의 한(恨)이 형식적인 사죄 몇 마디로 금방 잊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가신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도쿠가와에 대한 한은 뼈에 사무쳤다. 잘 때도 발을 도쿠가와가 있는 동쪽으로 두고 잤을 정도다. 모리 가문의 번주와 가신들 간에 다음과 같은 신년 인사가 264년간 되풀이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가신: 폐하. 도쿠가와 토벌의 건, 올해는 어떠신가요?
번주: 아니, 시기상조이니 내년으로 연기하자.
결국 조슈 번은 사쓰마 번과 함께 1868년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달성해 300년 가까이 된 한을 풀었다. 조슈는 아베 총리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하다. 처지를 바꿔 생각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발언한 데 대해 일본이 과민 반응할 이유가 없다.
일본은 중국을 압박할 때마다 국제사회의 규범을 빼들고 있다. 이번 협의에서도 국제사회의 규범에 합당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면 어떨까. 한일 관계의 미래를 밝히는 용기를 보이길 기대한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