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여 년 전인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대권을 잡은 이성계는 개경(현재의 개성)의 지기(地氣)가 쇠락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새 도읍지로 옮기려고 했다. 이듬해 태조 2년 이성계는 계룡산 길지(吉地)설을 받아들여 현장을 둘러본 뒤 공사에 착수하려 했다. 하지만 개국공신인 하륜은 계룡산 형세가 흉해 천년사직을 기대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의 완강한 제동으로 천도(遷都) 계획은 10개월 만에 폐기됐다.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는 2002년 9월 30일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을 공약했다. 국토의 균형 발전과 수도권 과밀화 해소를 명분으로 들었지만 충청권 표를 잡으려는 계산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1년 만에 충남 연기와 공주에 16부 4처 3청을 이전하는 신행정수도건설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위헌 소송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2007년 7월 세종시에 첫 삽을 떴다. 이성계가 잡았던 터가 600년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1998년 통계청 특허청 관세청 중소기업청 등이 대전으로 옮겨갔을 때 단신(單身)으로 부임한 기러기 공무원들이 꽃뱀에게 당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되곤 했다. 지난해 세종시 시대가 열렸지만 주거 여건은 좋지 않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원룸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상경하는 공무원도 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단신 부임한 공무원들끼리 아파트를 함께 얻어 생활하기도 한다. 혼자 살다 보면 불건전한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세종시 공무원들의 정신 건강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6월 기혼의 기획재정부 여성 사무관이 가족과 떨어져 살다가 목숨을 끊은 데 이어 며칠 전 보건복지부 20대 여성 사무관이 한 원룸에서 번개탄을 피운 채 숨졌다. 밤이 되면 어디 나갈 데도 없고 변변한 편의점 찾기도 쉽지 않은 ‘회색 도시’ 세종시의 그늘이다. 가족과 함께 살면 조금 우울한 일이 생겨도 화목한 분위기 속에 잊어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서울에 사는 공무원 가족들에게 세종시로 가서 무조건 합치라고 강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떤 묘약이라도 없을까.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