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논설위원
그럼에도 그의 돈키호테적 시도는 우리 정치판에서 약속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줬다. 안 대표가 말한 새 정치는 기초선거 무공천이 아니다. 그의 새 정치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말한다. 단지 기초선거 무공천은 모든 정당이 약속한 것이니까 이것부터 실천하자는 의미였다.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이 쉬운 말귀를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척 의도적인 왜곡이 난무했다.
옛 신문을 검색해 보시라. 기초선거 무공천은 공천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시도지사들이 맨 먼저 건의한 것이다. 그것을 거의 전 언론이 지지했고 모든 대선 후보가 받아들여 공약으로 내놓았다. 모두가 약속한 것이기에 가장 쉽게 실천될 줄 알았던 약속이 지방선거가 눈앞에 다가오자 도토리만 한 이익 앞에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혔다. 이것이 정치판의 파렴치한 모습이다.
기초선거 무공천을 둘러싼 상황은 본래 새누리당이 먼저 약속을 저버리고 민주당도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것이었다. 때로는 새누리당이 먼저 약속을 깨고 때로는 민주당이 먼저 약속을 깨는 차이는 있지만 돌아가는 게 늘 그런 식이었다. 이런 판에 편승하면 새 정치와 모순 관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안 대표가 끼어들어 원칙대로 하자고 주장했을 때 언론조차도 익숙해져서 새삼 의제로 삼지도 않던 헌 정치의 모습이 새롭게 부각됐을 뿐이다.
독일 사민당(SPD)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 주(州) 선거에 이기고도 정권을 포기한 적이 있다. 내가 유럽 특파원 때 있었던 일이라 잘 기억한다. 2008년 안드레아 입실란티 헤센 주 SPD 위원장은 좌파당과의 연정은 없다고 공약하고 주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녹색당과만의 연정으로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자 좌파당과의 연정을 모색했다. 이에 다그마어 메츠거 등 헤센 주 SPD 의원 4명은 공약을 저버리는 일이라며 끝까지 좌파당과의 연정에 반대했다. 결국 SPD는 선거에 이겨 놓고도 의석수가 모자라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결국 재선거가 치러졌고 기민당(CDU)이 승리했다.
정당의 존재 목적은 집권이다. 메츠거 의원 등은 SPD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들을 살려준 것은 독일 국민이었다. 독일 국민은 입실란티 위원장이 좌파당과의 연정을 모색하자 SPD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추락한 신뢰도 때문에 입실란티 위원장을 지지한 강경파 쿠르트 베크 당수가 결국 물러났다. SPD는 다시 온건파 프란츠 뮌터페링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것이 지금 지그마어 가브리엘 체제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치인이 약속을 지키게 만드는 것은 어디서나 깨어 있는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