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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폭력 아빠 몸서리치던 진규… 동생-친구에게 똑같이 폭력

입력 | 2014-04-16 03:00:00

[아동학대, 끝나지 않는 악몽]대물림하는 ‘폭력의 DNA’
아동학대 그후 7년, 진규는 지금…




《일곱 살 진규(가명)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다섯 살 여동생의 목에 줄을 감고 이 방 저 방으로 끌고 다녔다. 아버지는 동생을 이미 몇 차례 벽에 집어 던지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동생은 눈을 껌벅이며 숨을 헐떡였다. 진규는 아버지에게 맞을 때 ‘이러다 죽겠다’고 느끼곤 했는데 눈앞에서 동생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날도 주먹질에 앞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애새끼들은 맞아야 정신 차려.” 여동생이 숨진 지 7년. 올해 열네 살이 된 진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법원은 학대로 자녀를 숨지게 한 부모를 살인자로 보지 않지만 진규가 겪는 후유증은 ‘아동 학대가 살인보다 잔인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폭력’의 노예가 돼 있었다. 》

2007년 진규(가명·당시 7세)의 아버지는 다섯 살배기 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아버지가 수감된 뒤에도 진규네 집은 계속 전쟁터였다. 진규가 다른 여동생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한테 못된 것만 배웠다”며 진규를 미워했다. 남편에게 맞고 살던 엄마는 딸들을 지키려 아들을 때렸다.

3년 뒤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은 학대신고를 받고 진규네 집을 찾았다가 혼란에 빠졌다. 진규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우울증세를 가진 피해자인 동시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가해자였다. 페트병에 자기 소변을 받아 동네 아이들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있다. 아버지가 진규 남매에게 했던 단골 수법이었다. ‘폭력의 DNA’가 진규에게 옮겨간 듯했다.

진규는 1년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고 2년간 위탁가정에서 지냈다. 그 사이 중학생이 된 진규는 올해 2월에야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두 달쯤 지난 이달 초 진규는 그 집에 홀로 남겨졌다. 엄마가 여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진규 엄마는 아동보호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진규한테 예전 남편의 모습이 보여요. 무서워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전날 진규가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 부엌칼을 휘두르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데 이어 엄마한테마저 버림받은 진규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아버지가 뿌린 불행의 씨앗은 진규와 가족들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 생존본능이 공격성으로 표출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아동학대 피해 후 구조된 청소년 10명과 유년시절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30, 40대 성인 10명이 겪은 후유증을 취재했다. 이들은 폭력에서 벗어난 지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대에서 갓 탈출한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증상을 보였다. 장기간 심리적 물질적 결핍 상태에 있다가 쉼터 등 안정적인 환경에 놓이자 “이럴 때 최대한 챙겨놓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도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학대를 피하려 가출해 노숙생활을 하다 보니 도둑질이 몸에 밴 사례도 있다. 거짓말 역시 살려는 몸부림이다. 보통 학대 부모들은 폭력의 원인을 아동에게 뒤집어씌우거나 ‘약속을 안 지켰다’고 몰아세우며 폭력의 명분을 쌓는다. 학대받는 아동들은 솔직히 말했다가 무참히 구타당했던 적이 많아 상대가 원하는 대로 사실을 가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공격성도 자주 나타난다. 부모와 신뢰관계 형성이 안돼 상대를 잘 믿지 못하는 데다 더는 억압받지 않겠다는 절박함의 표출이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부모에게서 타인을 괴롭히거나 제압하는 요령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결과다. 피해 청소년들의 이런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섣불리 ‘문제아’로 낙인찍게 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이들의 후유증을 더 악화시킨다.

○ “엄마 계모 맞지?”

아동학대 피해 후 충분한 관심과 치료를 받지 못한 성인들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지금은 부모가 된 이 피해자들은 몸에 새겨진 학대의 관성이 자녀를 향할 때 극심한 자책감을 느낀다. 친부와 계모에게 골프채로 구타당하고 변기에 처박히는 ‘물고문’을 자주 당했던 A 씨(35·여)는 8세와 3세인 아이들에게 종종 손찌검을 한다. 큰아들은 “엄마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 같아. 엄마 계모 맞지”라고 농담하듯 말한다. 이 아이 역시 세 살짜리 동생을 자주 때린다. A 씨는 “나한테서 아빠의 모습을, 내 아이에게서 내 모습을 볼 때면 내 몸의 피를 모두 빼버리고 싶다”고 했다.

친부가 옆집에서 개 잡을 때 쓰는 몽둥이를 빌려와 마구 때리곤 했다는 B 씨(39). 그는 요즘도 개 짖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저려오고, 뒤에서 누군가가 몽둥이로 때리는 악몽을 자주 꾼다. 계모는 그가 초등학생 때 냉장고를 자물쇠로 채워 놓고 밥을 굶겼다. 그 때 생긴 식탐이 지금껏 이어져 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B 씨는 평소엔 조용한 성격이지만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직장 상사가 일방적 의견을 강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멱살부터 잡았다. 이 같은 분노조절 장애 탓에 다니던 공기업에서 해고됐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지금은 막노동을 하고 있다.

학대 피해 과정에서 형제간 신뢰가 깨져 성장한 후에도 사이가 회복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유년시절 두 살 터울 누나와 함께 8년가량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한모 씨(40)는 “매 맞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내가 안 맞고 누나가 맞을 때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집을 나온 한 씨는 그 후 누나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

한 씨는 “서로가 곤경에 처했을 때 방관했다는 원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세월이 지나도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신광영 neo@donga.com·배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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