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드 더 시티’ 블랙버전 ‘걸스’
미드 ‘걸스’의 주인공 해나로 나오는 레나 더넘은 각본과 감독까지 1인 3역을 소화했다. 미국 HBO TV 화면 캡처
이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섹스 앤드 더 시티’가 떠오른다. 마지막 시즌 방송이 2004년이니 이미 10년이 지난 드라마인데도 여전히 국내 케이블TV에서 재방송을 볼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이후 비슷한 드라마들이 나와 그 아성에 도전했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시즌3까지 방영된 ‘걸스’ 역시 줄거리만 보면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아류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20대 여자 4명이 나오니 30, 40대가 주인공이었던 섹스 앤드 더 시티의 후배 격이다. 실제로도 걸스는 시즌1 첫 회에서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캐리와 사만다 얘기를 하며 ‘선배’를 의식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당당하지도 않고 그럴 의욕도 없어 보인다. 하긴 매달 월세 걱정을 해야 하는 형편에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 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해나는 더이상 용돈을 주지 않겠다는 부모에게 왜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지 않느냐며 지질하게 굴고, 친구들끼리도 서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내 삶이 더 힘들다며 싸우기 일쑤다. 겨우 진지하게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에게 해나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연약하고 이기적인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집약한다.
걸스는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거나 혹은 진흙탕에서 뒹굴어도 겨우 도달할까 말까 한 판타지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또 어설픈 위로를 하거나 너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느냐며 과시하는 대신 세상이 원래 그리 관대하지 않다고 일침을 놓는다.
이상하게도 걸스의 우울한 뉴욕 풍경과 해나와 그 친구들이 일보 전진에 이보 후퇴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웃음이 나곤 한다. 아마도 세상이 나한테만 잔인한 건 아닌가 보다 하는 안도감 때문 아닐까.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