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호를 만나다]<10>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 편보라 소령
합동참모본부 소속이지만 유지비행을 위해 3일 경남 사천의 훈련비행단을 찾은 편보라 공군 소령. 편 소령은 “조종사가 천직”이라며 훈련기에 올랐다. 사천=서영수 전문기자kuki@donga.com
최초의 여성 공군사관생도이자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인 편 소령은 처음으로 전투기를 몰고, 사격대회에서 최우수 조종사가 되고, 영관장교가 될 때마다 주목을 받았다.
예비 훈련에서 느낀 군인정신
“편보라!”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무리들 속에서 “에이∼” 실망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름만큼 얼굴도 예쁠 거라 한껏 기대했다가 실망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선배들에게 들었다. 놀림을 당했다는 느낌에 첫날부터 기분이 상했다. 예비생도 숙소에 들어서자 이번엔 절망감이 엄습했다. 조그만 창문의 내무반이 감옥처럼 답답해 보였던 것. 이어 전투복에 명찰을 꿰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바느질까지 해야 돼?’ 투덜대며 명찰을 꿰매는데, 생활지도 선배가 오더니 쭉 찢으며 말했다. “바느질 간격이 안 맞습니다.”
다음 날부터 훈련이 시작됐다.
“오전 6시에 집합시키곤 선배가 외쳤죠. ‘삼보 이상은 구보다!’ 무조건 뛰게 하는 거예요. 연병장에서 30분을 뛰고 식당으로 향하는데 가파른 언덕길이 나왔어요. 선배가 ‘악이다∼’를 외치며 내달렸어요. 예비생도들도 ‘깡이다∼’ 받아치며 뛰어야 했죠. 훈련기간 내내 뛰었어요. 맨손으로 뛰다 총을 들고 뛰고 나중엔 10kg 군장을 메고 뛰었죠. 전 몸이 무거워 늘 뒤처졌어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모의 훈련이란 걸 나중에 알았어요. 정말 무서웠죠. 그런데 도망치진 않았어요.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고, 내가 군인의 길에 들어섰구나,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어요.”
‘편대 편씨’ 칭찬에 날개 달다
사관학교의 생도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느 대학생활의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2km 아침 구보로 하루를 시작해 8교시 빡빡한 수업을 소화해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km 구보를 했고, 내무검사를 받았다. 옷장 속 속옷까지 ‘각’ 잡아 정리하고, 총은 항상 반질반질해야 했다. 청소상태를 점검하는 내무반장의 흰 장갑에 먼지라도 묻는 날이면 ‘얼차려’가 떨어졌다. 기숙사를 나설 때마다 선배들에게 복장과 자세를 지적받았고 수시로 얼차려를 받았다.
이런 와중에도 여생도들은 쏟아지는 취재 요청에 순번을 정해 응했다. 관심과 지원을 받는 만큼 질시와 질타도 갑절로 돌아왔다. 남녀 생도가 함께 훈련을 받을 때도 여생도의 실수는 도드라졌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졸업 뒤 이어진 2년간의 조종 훈련은 또 다른 ‘지옥 훈련’이었다. 목숨과 직결된 탓에 학교 때보다 더 엄격했고 외워야 할 조종수칙만 해도 1000가지가 넘었다. 항공역학 같은 비행이론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좌절하기를 여러 차례, 중간에 그는 교관에게 ‘콜’을 청했다. ‘콜’은 기상·행정·교육 같은 다른 특기로 전향하겠다는, 한마디로 조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훈련을 버티지 못해 ‘콜’을 외치는 훈련생들이 적지 않았다. 테스트에서 탈락해 떨어지기도 했다.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상황이었다.
“숨 막히는 경쟁 압박감으로 친한 동기들끼리도 서먹해질 정도였어요. 두렵고 숨고 싶은 마음이었죠.”
당시 교관은 그런 그를 몰아세우기보다 다독여줬다. 불러다 따뜻한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그러다 비행기 두 대가 함께 비행하는 편대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한 몸처럼 비행하는 편대비행에서 그가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편보라 너, ‘편대 편씨’였구나.” 교관의 칭찬은 그를 날게 했다.
최우수 사격수의 후폭풍
2004년 가을 강원도 공군전술사격장에 전시태세가 갖춰졌다. 공격기들이 5000피트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험준한 산세 사이로 적진에 폭탄을 투하해야 했다. 그의 A37 공격기도 목표지점 상공을 맴돌았다. 목표물을 발견한 순간, 그는 고도를 낮췄다. 협곡 사이로 돌풍이 일었다. 기수를 돌려 바람을 탔다. 바람도 멈춘 듯한 고요 속, “레디, 나우(Ready, now).” 폭탄이 발사됐다. 명중.
공군 전 대대가 참가해 최고의 전투조종사를 가리는 최대 행사 ‘보라매 공중사격대회’에서 그는 ‘저고도 사격부문 최우수 조종사’로 선발됐다.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최우수 조종사라는 타이틀을 더하자 그는 스타가 됐다.
그런데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그를 찾자 동료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단지 ‘여자라서’ 주목받는 상황에 거부감을 내비쳤다. 주눅이 들었고, 비행도, 사격도 엉망이 됐다. 졸지에 ‘바람 든 조종사’가 됐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쓴소리하는 선배도 있었다.
“‘그렇게’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난 예전대로 하는 것 같은데 평판은 나빠지고, 비행은 안 되고. 근데 그때 또 결혼을 했어요. 결혼을 하니까 남자 동료들하고 서먹해지더라고요. 남편은 민간인이라 주말에만 잠깐씩 보고. 고립감을 느꼈어요. 한동안 슬럼프가 심했죠.”
시간이 약이었다. 그는 관심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러던 2007년 사천 비행단 훈련교관이 됐다. ‘편대 편씨’로 불린 추억이 있던 사천에서 그는 평온을 되찾았다. 가르치는 입장이 되자 초심으로 돌아갔다. 매일 오전 오후 두 번씩 훈련기에 훈련생을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3년 동안 8명을 가르쳐 수료시켰다.
비행시간 1430시간
사천은 그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여섯 살 아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기자와 만난 3일은 비행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유지비행에 나선 날이었다. 그는 현재 합동참모본부에서 공중전 연습모의를 담당하고 있다.
“아직도 군인이자 엄마로 고민이 많아요. 비행 때문에 아들은 돌이 지난 후로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헤어져 지냈어요. 서울에서 근무하는 요즘에야 같이 살고 있죠. 언제 또 원주로, 사천으로 발령받을지 모르죠. 여군은 특히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해야 해요.”
심각해진 그의 낯빛이 훈련기 조정석에 앉자 이내 밝아졌다. 그는 “그래, 이 느낌이야”를 외쳤다. 그녀를 대한민국 공군으로 살게 하는 힘은 뭘까.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자긍심이죠. 자긍심이 점점 커져요. 특히 합참은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본부라 우리 주권, 영토를 지킨다는 실체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돼요.”
그는 여군이란 말이 싫다고 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 여군이라는 이유로 주목받는 상황은 이제 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남자와 똑같은 역할을 하라고 여자를 뽑는 건 아닐 거예요. 여성만의 장점을 발휘해야 하는데, 어떻게 기여할지는 제 숙제이기도 하죠.”
조종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종사는 체력과 정신이 수레바퀴처럼 균형을 이뤄야 해요.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비행을 할 수가 없어요. 여자는 체력이 약점이지만 정신을 단단히 무장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계속 노력해야죠.”
그가 조종석에 앉고 캐노피가 덮였다. 프로펠러가 굉음을 내며 돌고 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1430시간째 비행이었다.
사천=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