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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왜 頂上會談인가

입력 | 2014-04-19 03:00:00

치밀한 연출속 ‘선물’과 ‘압박’ 오가는 ‘국제외교의 꽃’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국제사회의 질서 속에서 치러지는 정상회담은 외교의 ‘꽃’으로 불린다. 하지만 정상 간 만남에서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박근혜 대통령과 토니 애벗 호주 총리가 8일 청와대에서 만나 회담하고 있다(위 사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시켰고(아래 왼쪽 사진), 빌 클린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동아일보DB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집권 전인 1959년 “벼랑에서 만나는 것보다 정상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정상회담’의 중요성을 간파한 말이다. 각국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정상회담은 국제 외교의 ‘꽃’이다. 하지만 그 꽃은 저절로 피는 게 아니다. 끝없는 ‘밀당’(밀고 당기기)과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치밀한 연출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은 연애와 비슷하다. 성공하면 아름다운 결실을 보지만 실패하면 그보다 잔인한 것도 없다.

8일 청와대 충무실에서는 한국을 방문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를 환대하는 만찬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호주산 쇠고기와 호주산 와인 투 레프트 피트(Two Left Feet·두 개의 왼쪽 발)를 내놓았다. 이 와인에는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담겨 있다. 포도주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부는 처음 데이트를 할 때 남편이 하도 긴장을 해 춤을 추면서 계속 부인의 발을 밟았다고 한다. ‘두 개의 왼쪽 발’에는 연애 초 설레는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다.

이날 만찬의 하이라이트는 가야금 연주였다. 애벗 총리가 구슬픈 가야금 소리에 흠뻑 젖어있을 때 연주된 곡은 다름 아닌 호주의 전통민요 ‘왈츠를 추는 마틸다(Waltzing Matilda)’였다. 애벗 총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국과 호주는 2006년 12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한 지 7년 4개월 만인 이날 협정서명식을 열었다. 양국 정상 모두 취임 이후 처음 서명한 FTA였다. FTA 타결에는 정상 간 이런 유대감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정상의 실력이 드러나는 정면승부의 장

애벗 총리도 박 대통령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을 때 육영수 여사, 영애 시절의 박 대통령과 함께 기념식수를 하는 사진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아버지를 따라 처음 해외 순방에 동행했다. 16세 소녀의 눈에 호주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박 대통령은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당시의 추억을 적어놓았다.

두 정상은 11월 호주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다시 만난다. 그곳에서 또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당장 다음 주에도 다른 드라마 한 편이 예고돼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5일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박 대통령과는 세 번째 만남. 더이상 탐색전은 없다. 서로의 구애(求愛)에 어떻게 화답할지 지켜볼 일이다.

정상회담은 각국 정상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면승부의 장이다. 아무리 참모들이 준비를 많이 해줘도 현장에서 대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순전히 정상의 몫이다. 정상회담도 비즈니스 협상과 다르지 않다.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상대의 호감을 얻는 게 우선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상대의 기호(嗜好)를 세세하게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상대가 ‘파격적 예우’를 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도 필수다. 정상회담을 ‘배려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파격의 달인’은 오바마 대통령이다. 2011년 10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초청한 오바마 대통령은 만찬 장소를 백악관이 아닌 외부 식당으로 잡았다. 그것도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한식당 ‘우래옥’으로.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까지 식사를 하러 간 것이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불고기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비빔밥을 시켰다. 식사 도중 미 의회에서 한미 FTA 이행법안을 통과시키는 ‘깜짝 선물’도 안겼다.

지난해 5월 박 대통령을 초청했을 때는 국빈방문이 아닌데도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경호를 지원했고 백악관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를 숙소로 내줬다. 영빈관에는 1965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명록 서명이 놓여 있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오찬장으로 이동하기 직전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배석자를 물리고 잠시 백악관 로즈가든을 산책하자고 제안해 두 사람만 10여 분간 사적인 대화도 나눴다.


당신이 행복할 때까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에서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7월 방한 당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청와대 연무관에서 수영을 하는데 스피커에서 자신의 애창곡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수영하는 동안 엘비스 프레슬리부터 재즈까지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나왔다. 한국의 후한 환대의 사례”라고 적었다. 외교부에서 사전에 클린턴 대통령의 애창곡까지 세심하게 챙긴 결과였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파격 예우’가 화제였다. 두 정상은 예정에 없던 특별오찬을 포함해 무려 7시간 30분을 함께 보냈다. 지난달 독일 작센 주 드레스덴 방문에서는 스타니슬라프 틸리히 작센 주 총리가 박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다시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전체 일정을 수행해 한국 측을 놀라게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동북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 외국에서 호감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순방 기간에 방문국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을 반드시 찾는 것도 친밀감을 높이려는 의도다. 올해 1월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인도 독립의 성지(聖地)이자 세계문화유산인 레드포트를, 지난해 6월 중국 방문 때는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의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을 찾았다.

박 대통령의 ‘드레스코드’도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항상 방문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색상을 택한다. 프라나브 무케르지 인도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을 때 박 대통령의 한복은 녹색 치마에 노란색 계열의 저고리였다. 인도 국기와 같은 색상이었다. 그러자 만모한 싱 인도 총리의 부인은 “인도 분위기(Indian touch)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박 대통령은 순방 시 의상을 직접 고른다고 한다.


‘감성 터치’가 먹히지 않는 나라

정상회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철통같은 경호. 올해 3월 네덜란드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일행이 총리공관으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두 차례 통역이 필요 없는 정상회담을 열었다. 바로 북한이다. 2000년과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여느 정상회담과 전혀 달랐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말 북한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과 비료 제공을 맞바꾸는 비밀회담을 시작했다. 이듬해 협상이 타결되면서 대북 비료 지원이 시작됐다. 그해 말부터는 북한이 여러 채널로 한국에 경제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어떤 의제를 논의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니,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정상회담에 앞서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두 차례 평양으로 가 청와대가 생각하는 정상회담 의제와 남북공동선언 초안, 일정과 경호, 의전 등에 관한 주문사항을 전달했으나 평양은 침묵했다.

뜻밖에도 김 위원장은 공항까지 ‘깜짝 영접’을 나왔다. 파격 예우의 중요성을 알았던 걸까. 김 대통령은 전용 1호차에 타지 않고 김 위원장과 동승하는 ‘충격’(경호의 관점에서는)도 연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차 회담에서 카메라가 빠지자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에게 “섭섭한 말씀을 드려야겠다”며 운을 뗐다. 당시 한국 일부 대학의 인공기 게양 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했다. 김 위원장은 “이런 분위기에서 회담을 할 수 없다”며 “환대 받는 것에 만족하고 푹 쉬었다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7년 정상회담도 어렵사리 남북공동선언까지 채택했지만 전말은 순조롭지 않았다. 외교 의전상 정상회담은 서로 녹음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파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남북 간에는 서로 녹음을 한다.

심지어 2007년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측 대표단의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에서는 도청장치가 7개나 발견됐다. 정부 당국자는 “숙소에 카펫이 아닌 장판이 깔린 것이 이상해 걷어내니 도청장치가 있었다”며 “일부러 북측에서 들으라고 ‘이건 뭐야’라며 소란스럽게 뜯어냈다”고 말했다. 남북 간 합의문 초안을 만들 때도 혹시 몰래카메라에 찍힐까 봐 실내에서 우산을 쓰고 작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긴장의 연속, 아찔한 순간

박 대통령의 참모들에게 외국 방문에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을 물으면 누구나 주저 없이 ‘꽈당 사건’을 꼽는다. 지난해 11월 6일 영국 방문 때 박 대통령이 런던 시장 주최 만찬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다 넘어진 사건만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는 것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드라마틱한 입장(Dramatic Entry)”이라는 재치 있는 말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의전과 경호에 큰 허점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청와대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올 1월 말 청와대 경호실 수행부장이 교체된 데 이 사건이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고 나온다.

순방 기간에 가장 긴장하는 참모는 아무래도 통역일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최악의 정상회담 중 하나로 꼽히는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의 한미 정상회담은 ‘통역의 실패’라는 지적도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평화체제 논의가 가시권에 왔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부시 대통령은 이와 유사한 얘기를 했지만 통역이 그 뜻을 충분히 노 대통령에게 전하지 못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종전(終戰) 선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다시 한번 부시 대통령을 ‘졸랐고’, 부시 대통령은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역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자 노 대통령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더이상 어떻게 분명히 말하느냐”고 받아쳤다.

박 대통령의 통역은 정반대 경우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오히려 박 대통령이 통역 내용을 바로잡아주기 일쑤다. 1월 스위스를 방문해 평생교육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통역은 평생교육을 ‘Lifelong education’으로 전달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Continuing education’이라고 수정했다.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를 박 대통령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3월 독일에서는 박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전당대회 때 통화했다는 얘기를 통역이 옮기면서 전당대회를 ‘Party congress’라고 하자 이번에도 박 대통령은 ‘Party convention’이라고 직접 바로잡았다.

여러 정상이 모이는 다자회의에서 이뤄지는 양자회담은 매우 긴박하게 일정이 잡히는 일이 많아 정상의 순발력이 중요하다. 3월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열린 한중 정상회담은 출국하기 이틀 전 회담 날짜가 정해졌다고 한다. 다행히 두 정상이 오랜 인연으로 친분이 두터워 30분 예정된 정상회담은 1시간 2분간 진행됐다. 박 대통령은 준비한 얘기를 가능한 한 전부 하는 스타일이고, 시 주석은 통 크게 화답하는 일이 많아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세계 역사의 전환점에는 언제나 정상회담

‘정상(summit)’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다. 냉전시대인 1950년 2월 14일 영국 에든버러 연설에서 소련 최고위층과의 회담을 제안하며 “정상에서의 회담으로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1953년 5월 11일에는 “각국이 정상에서 평화의 의지를 다지자”고 호소했다. 이 무렵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여덟 번째 도전 만에 정상을 정복했다. 미국 국무부는 1955년 등산용어였던 ‘정상’이란 표현을 정식 외교용어로 처음 채택했다. 물러설 곳 없는 정상에서 지도자들끼리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이란 용어는 적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이란 용어가 1950년대에 등장했다고 해서 그전에 정상회담이 없었던 건 아니다. 369년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의 지도자인 아타나리크를 다뉴브 강에서 만나 고트족의 이주를 허락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정상회담은 제국의 국경을 이루는 강에서 주로 열렸다는 점이다. ‘정상회담’의 저자인 데이비드 레이놀즈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역사학과 교수는 “그곳이 누구의 땅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행기와 미디어의 발달은 정상회담의 패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현대적 의미의 정상회담을 개척한 사람은 네빌 체임벌린 전 영국 총리다.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광기를 잠재우고자 1938년 히틀러에게 독일 뮌헨 회담을 은밀히 제안한다. 히틀러의 별장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회담을 어떻게 진행할지부터 논의했다. 의제까지 세심하게 정하고 만나는 지금의 정상회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뮌헨 합의서’를 체결하고 귀국한 체임벌린 전 총리의 일성은 “유럽에서 전운(戰雲)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확히 1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현대 정상회담은 이처럼 암울하게 시작됐다.

그럼에도 20세기 세계 역사의 전환점에는 늘 정상회담이 자리하고 있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모두 네 차례 정상회담을 열었다. 레이놀즈 교수는 네 번의 정상회담이 ‘유화→억제→긴장 완화→변모’의 패턴을 밟았다고 진단했다. 가장 극적인 미소 간 정상회담은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회담이다. 냉전 종식의 물꼬를 튼 역사적 회담이었다. 레이놀즈 교수는 “데탕트(긴장 완화)를 넘어 냉전 세계를 변모시킨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이상가 고르바초프의 재촉을 받은 ‘과격한 냉전의 전사’ 레이건이었다”고 말했다.  
▼ 이승만 “일본과는 상종안해” 美 국빈방문때 ‘호통회담’ ▼

‘호통 외교’로 출발한 대한민국 정상회담


1952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오른쪽)가 이승만 대통령이 선물한 태극기를 받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6·25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이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아일보DB

대한민국 최초의 정상회담은 1949년 8월 방한한 장제스(蔣介石) 대만 총통과 이승만 대통령의 회담이다. 하지만 이보다 주목해야 할 회담은 1954년 7월 미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이다. 헌정 사상 처음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외교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이른바 ‘호통 외교’다.

발단은 한미 정상회담 뒤 발표할 공동성명서의 초안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로서…’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해 동아시아에서 미군이 원활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한일 간 불편한 관계로 미국이 골머리를 앓은 것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 대통령은 참모들을 불러 폭탄선언을 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이 대통령은 참모들의 거듭된 설득에 회담장에 가기는 했지만 10분 지각했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일 국교 수립 얘기를 꺼내자 이 대통령은 폭발했다. “내가 사는 한 일본하고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화를 벌컥 내며 옆방으로 가버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가까스로 화를 삭이고 회담장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이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기자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니 먼저 갑니다.” 후손들이야 통쾌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당시 한국 참모들이나 미국 측의 표정은 어땠을까.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이승만 6회 △박정희 8회 △전두환 7회 △노태우 12회 △김영삼 14회 △김대중 24회 △노무현 28회 △이명박 49회다. 정부 관계자는 이런 기하급수적 증가가 “한국 위상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원하는 나라가 끊임없이 방문을 요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다자회의 참석도 많아졌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1년 2개월간 7차례에 걸쳐 13개국을 방문했다. 모두 방문국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용한 경비는 약 33억3000만 원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5년 동안 사용한 순방 비용은 약 1200억 원으로 한 번 출국할 때마다 평균 24억5000만 원을 썼다.


이것이 바로 ‘정상회담 의전’

국제적으로 상석은 오른쪽이다. 문화적 종교적으로 왼쪽을 불결하게 여기는 전통의 흔적이다. 따라서 손님이 오른쪽에 선다. 박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면 방문국 정상 오른쪽에, 외국 정상이 한국을 찾으면 박 대통령이 외국 정상 왼쪽에 서는 것이다. 국기는 보통 엇갈려 놓는다. 외국 정상 뒤에 태극기를, 한국 정상 뒤에 상대국의 국기를 놓는 식이다. 러시아 등 일부 국가는 방문하는 국가의 국기를 예우 차원에서 오른쪽에 놓기도 한다.

정상의 방문은 △국빈방문 △공식방문 △실무방문 △사적방문 등 네 가지로 구분된다. 국가마다 방문 형식에 따른 의전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한국은 국빈방문 시 정상회담을 열고 대통령 주최 만찬을 제공한다. 또 외국 정상과 공식 수행원 10명의 체재비와 차량 6대를 지원한다. 경찰 사이드카는 17대를 동원한다. 한국은 국빈방한을 대통령 임기 중 국가별 1회로 제한한다. 다만 재선하면 예외적으로 재차 국빈방한이 가능하다.

미국은 해외 순방 때 대통령 방탄차(비스트)를 미국 현지에서 공수해온다. 필요하면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마린 원)까지 가져온다. 수행원 규모가 경호원을 포함해 700여 명에 이르다보니 호텔 한 곳을 통째로 빌리기도 한다. 대통령 숙소를 기준으로 위아래 여러 층을 비워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정상은 서울시내에서 하얏트호텔을, 일본 정상은 신라호텔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빈방문 때는 공항에 내리면 21발의 예포를 쏜다. 왜 21발일까. 예포는 싸움에서 이긴 쪽이 패한 적에게 무장해제의 표시로 탄환을 모두 소진하는 17세기 영국 해상 관습에서 유래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함정에 적재하는 표준 포의 수가 7문이라는 점에서 7발을 쐈다. 하지만 당시 화약은 해상보다 육지에서 보관하기 쉬웠다. 해상에서 1발을 쏠 때 보통 육지에서는 3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해상에서 7발을 쏠 때 육지에서는 21발을 쏠 수 있었고, 그 관행이 굳어져 예포가 21발이 됐다는 얘기다.

방문국의 초청을 받아들여 순방 일정이 정해지면 통상 두 달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팀장으로 한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가 꾸려진다. 여기서 3, 4차례 회의를 거쳐 세부 의제와 일정 등을 조율한다. 한 달 전에는 의전 경호 홍보 담당자들이 현지답사에 나선다. 훈장이나 선물 교환 여부, 경호용 총기류와 통신장비 반·출입 절차, 비표 운용 계획 등도 꼼꼼히 논의한다.

대통령 순방 행사는 보안 유지를 위해 코드명을 붙인다. 지난해 5월 미국 방문 때 코드명은 ‘새시대’였다. 같은 해 6월 방중 때는 ‘서해안’이란 코드명을 붙였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급히 변경하기도 했다. 코드명은 보통 세 글자로 붙인다.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할 때는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만난다고 해 각자 이름의 앞 글자를 따 ‘노고산’이라고 붙였다.  

이재명 egija@donga.com·조숭호·윤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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