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 당시 브리지에선 무슨 일이
동아일보는 18일 조타수와 기관사 등을 만나 사고 직후부터 탈출까지 선장과 1·2·3등 항해사 등 핵심 선원들의 행적을 재구성해 봤다.
○ 사고 직후 무용지물 된 수평장치
급선회하면서 세월호는 순식간에 선원들이 이동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파르게 기울었다. 근무를 마치고 객실에서 쉬고 있던 조타수 오모 씨(58)가 브리지 문 앞에 가보니 선장 이 씨가 한 손으로 문고리를, 다른 손으로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브리지 문 옆에 있는 선장실에서 자다가 사고를 직감하고 나온 것이다. 오 씨는 이 씨를 뒤에서 밀어 브리지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고 직후 브리지에는 선장과 1등 항해사 2명, 2·3등 항해사 각 1명, 조타수 3명 등 8명이 모두 모였다. 선장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해도대(해로가 그려진 도면이 올려진 책상)를 붙들고 버티며 “구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타수 오 씨가 문 반대편 10여 m 거리에 있는 초단파무선통신(VHF) 무전기를 세 번째 시도 만에 간신히 잡아 2등 항해사 김모 씨에게 전달했다. 김 씨는 해경과 제주 항만동에 “빨리 와 달라. 배가 기우니 구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전 8시 55분이었다.
구조 요청 직후 선장은 “힐링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힐링펌프는 배 좌우측에 설치된 물탱크로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반대편으로 물을 대거 이동시켜 수평을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다. 힐링 스위치를 누르면 자동으로 균형이 조절된다. 조타수 박모 씨(60)가 간신히 스위치를 눌렀지만 이미 배가 크게 기운 상태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성인 3등 항해사 박 씨는 더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해 좌현 문 구석에 밀려가 있었다.
○ 승객에게 전해지지 않은 ‘퇴선 명령’
구명정 펴는 것까지 실패하자 선장은 오전 9시 40분경 책상에 매달린 채 큰 소리로 ‘퇴선 명령’을 내렸지만 이는 승객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퇴선 명령은 배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통상 선장이 1등 항해사에게 내리는데 이때는 1등 항해사 강 씨가 브리지 밖에 나가 있는 상태라 명령 전달체계가 흐지부지해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선원들은 “퇴선 명령이 누구에게 전해졌고 어떻게 이행됐는지 모르겠다”며 “객실에 방송되지 않은 걸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승객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만 들었을 뿐 퇴선 명령 방송을 듣지 못해 대다수가 하염없이 객실에서 기다리고만 있었고, 대규모의 실종·사망자를 내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선장 이 씨 등은 승객들이 배를 탈출하고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먼저 배를 버리고 피하는 데 급급했다.
○ 1시간여 만에 핵심 선원 모두 탈출
브리지에 있던 선장, 항해사, 조타수 등 8명과 기관장, 기관사 등 7명은 오전 10시경 해경 구조보트에 모두 구조됐다. 사고 발생 직후 1시간여 만에 배의 핵심 선원들이 줄줄이 배를 빠져나간 것이다.
엔진을 책임지는 기관실 선원들은 선장의 퇴선 명령 전에 이미 근무지를 비우고 대피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장 박모 씨(48)는 오전 8시 50분경 브리지로 들어와 선미 하단부에 있는 기관실에 직통전화를 걸어 대피를 지시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본 한 선원은 “선장 허락도 없이 근무지 이탈을 지시하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다. 기관실에 있던 선원 6명은 이 전화를 받고 갑판으로 올라와 몸을 피했다가 기관장과 함께 오전 10시경 모두 구조됐다.
선장은 해경의 첫 구조선을 타고 배를 떠날 때는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해경에 따르면 이 선장은 16일 오전 10시 구조 직후 신원을 묻는 해경의 질문에 ‘일반 시민’이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남방과 니트를 입은 채 승객인 척 구조대원의 안내를 받았다. 이어 오전 11시 16분경 이 선장은 선원들과 함께 구조선에서 내렸다. 이 선장은 이후 구조자들이 임시로 머물던 팽목항 매표소 건물로 들어갔다. 이 선장은 담요를 받고 구조된 승객 틈에 끼여 현장요원의 안내를 받았을 뿐 누군가에게 사고 현장을 설명하거나 승객들을 돕지 않았다.
해경이 이 선장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 혐의를 적용시킨 것은 이 같은 이 선장의 행태를 확인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 관계자는 “자동차 사고가 나 경찰이 출동하면 자신이 운전자임을 밝히지 않고 현장을 이탈하면 뺑소니가 되는 것처럼 선장은 해경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선장임을 밝혔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선장은 이송된 병원에서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다가 동아일보 기자가 신원을 묻자 그냥 “승무원”이라며 “사고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선장은 16∼18일 잇달아 목포해양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와 “면목 없고 죄송스럽다”는 말만 반복하며 울먹였다. 기관보조원인 조기수 박모 씨(60)도 경찰서에서 기자들과 만나 “(승객들을 먼저 구하지 못해) 할 말이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목포=조동주 djc@donga.com·여인선·박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