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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전부인 사람들… 내 자식 살아 다행이란 생각조차 죄스러워”

입력 | 2014-04-21 03:00:00

‘세월호 참사’ 안산시 고잔동 사람들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교 2학년생 100여 명의 집이 있는 경기 안산시 고잔1동. 연립주택과 다가구주택이 몰려있는 이 동네는 하루아침에 학생과 학부모들이 텅 빈 슬픔의 도시가 됐다. 평일에도 인적이 드문 동네가 된 이곳에 주민들만 서넛씩 모여 한숨섞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산=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이 집이야, 이 집.” 김정례 할머니(71)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한 다세대주택 2층집이었다. 외벽 페인트가 벗겨지고 여기저기 녹슨 건물의 2층 베란다 창문으로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보였다. 할머니는 “이 집 손자가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19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역 앞에서 단원고로 가는 길을 묻다 우연히 만난 주민이었다. 1980년대 초 안산 신도시가 들어선 직후부터 고잔동에서 30년을 살았다는 할머니는 “내 자식 남의 자식 따로 있나. 다들 얼굴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안산시에는 조선시대 풍속화가 김홍도의 호 단원에서 유래한 단원구와 심훈의 소설 ‘상록수’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활동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상록구 등 2개구가 있다. 이 중 단원구가 안산시청, 종합경기장이 들어서 안산시의 공공시설과 문화의 중심지이다.

단원구에서도 중심동(洞)이 바로 이번에 변을 당한 단원고가 있는 고잔1동이다. 고잔1동 주민센터 이병인 사무장(50)은 “여기에는 20, 30년 정도 된 연립주택에 사는 주민들이 많은데 이번에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 100여 명이 이 동네 학생들”이라고 전했다.

고잔1동에 단원고 학생 비율이 높은 것은 2년 전 시행된 고교평준화 정책 때문. 이 사무장은 “안산시는 단원구와 상록구로 나눠 학교를 선택하도록 했는데 고잔1동에 사는 학생들이 대부분 집과 가까운 단원고를 택했다”면서 “이번에 참사를 당한 2학년 학생들은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행된 후 입학한 최초 학년”이라고 했다. 그 바람에 이번 참사로 고잔1동 전체가 하루아침에 빈 동네로 변했다는 설명이었다.

경기 서남부의 중추도시 안산은 역사가 38년밖에 안 된 젊은 도시다. 1976년 시흥군 수암면 군자면과 화성군 반월면 일부가 ‘반월신공업도시’로 조성됐고, 1986년 안산시로 승격됐다. 이 과정에서 일자리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지금의 안산시 토착민들인 셈이다. 대부분 시화공단, 반월산업단지에서 일하는 공단 근로자들이다. 고잔1동 우성빌라에 산다는 박연숙 할머니(70)는 “옆 동네 와동에 살다가 내 집 한번 가져보겠다고 3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며 “그때만 해도 고잔동 집값이 싸서 2000만 원만 있으면 방 두 칸짜리 집을 샀다”고 했다.

고잔1동은 신도시가 건설될 당시 신축된 연립 다가구주택이 밀집된 대표적 서민주거지역이었다. 9100여 가구, 3만3000여 주민 가운데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소년소녀가장 등 각종 지원을 받는 주민이 35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주민들은 10(33m²)∼15평(50m²)짜리 연립주택에 3대가 같이 사는 가족이 많은데 대부분 맞벌이 자녀들을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 손녀를 키우고 있다.

이곳에 있는 현대아트빌라는 총 6개동으로 1개동에 18가구가 들어선 작은 빌라였다. 이 중 6동에 살고 있는 두 집 아이가 현재 실종자로 분류된 상태다. 부모는 모두 진도로 가고 없어 양쪽 집에는 할머니들만 홀로 남아 손주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외손주를 기다린다는 강모 할머니(80)는 “진도 내려간 아들이 전화도 없고 가끔 전화를 하면 절대 TV도 보지 말라고 한다.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해준다. 나는 바깥에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귀가 번쩍번쩍 하는데”라면서 초조해했다. 강 할머니 옆집에서 역시 손자를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할머니는 “내가 교회쟁이라 교회 사람들이 만들어준 미음으로 겨우 한 술 뜬다. TV 보며 울다가 손주 등하교 시간이면 집 앞에 나와 기다리다가 이웃들 걱정 어린 소리를 듣는 게 요즘 일과”라고 했다.

고잔1동 연립주택 단지 내 슈퍼마켓을 지나니 TV에서 뉴스 특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슈퍼 여주인은 “아들과 딸이 단원고에 다니는데 고1, 고3이라 이번에 수학여행은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잦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10년 전이라고 했다. “용인에서 이사 왔는데 이웃 인심이 너무 좋아 금세 정이 들었다. 김장철에는 여기저기서 김치를 한 통씩 주니까 따로 김치 담글 일이 없을 정도다. 낮에 대문 안 잠그고 살아도 되는 동네다. 집집마다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 정도다.”

마침 슈퍼에 들른 한 중년 아주머니가 이 말을 듣더니 거들었다. “(경기도) 안산은 ‘안 산다, 안 산다’ 하면서도 계속 사는 곳이다. 부천보다 집값이 싸서 오는데, 돈 벌면 여기를 떠야지 했다가도 이웃간 정 때문에 못 나간다.”

슈퍼 길 건너편 꽃집 앞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단원고 1학년 3학년 학생들이라고 했다. 학생들 손에 하나같이 대국(大菊·꽃송이가 큰 국화)이 들려 있었다. 꽃집 주인 박미자 씨(61·여)는 “대국은 장례에 쓰는 꽃이라 그동안 꽃집이어도 들여놓을 일이 없었는데…”라며 “우리 옆집, 앞집 아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여기 고잔1동에는 한 집 걸러 한 집씩 상을 치를 정도”라고 했다.

지하철 4호선 고잔역에서 북쪽으로 1.5km 직진 거리에 위치한 단원고교. 지도만 봐도 한눈에 계획도시라는 게 들어온다.

단원고 앞에는 원고잔공원이라고 불리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 안은 조용했다. 공원 관리인 정윤영 씨(60)는 “매일 오후 서너 시만 되면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공원으로 몰려와 조잘조잘 북적거렸는데 아이들이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사라졌다”며 “시 전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라고 했다.

공원 벤치와 바위 위에는 넋을 놓은 듯한 표정의 주민들이 앉아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는 “아는 이웃집 아이가 사고를 당해 그냥 학교 앞에 와 봤다”며 “아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하니 TV도 못 보겠고, 신문기사도 못 읽겠고, 가슴이 떨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자원봉사를 하러 단원고로 한달음에 달려온 인근 학교 학부모들도 있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를 둔 민희수 씨(42·여)는 “내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다행이란 마음을 갖기에도 죄스럽다”며 “살아온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할 수도, 위로를 할 수도 없다”고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엄마들끼리는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난다”고도 했다.

학교 앞 가게 주인 유덕수 씨(52·여)는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과자를 사간 아이들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엔 수양딸처럼 예뻐하던 여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유 씨의 말이다.

“아빠는 실직하고, 엄마 혼자 벌어 어렵게 사는 아이였다. 아이 엄마가 일주일 전쯤 찾아와 통장에 돈이 없는데 딸 수학여행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어찌어찌 마련해 겨우 보냈는데 이런 사고가 났으니…. 아이 엄마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하면 슬프고 분해서 밤에 누워도 잠이 안 온다. 억장이 무너지고 화가 나서.”

안산시 주민들은 신도시 특성상 고학력자가 많다. 경기복지재단(2012년) 자료에 따르면 고졸자 비율이 42%로 시흥 오산 동두천과 함께 높은 분포를 나타냈다.

와동에서 교회를 운영하며 봉사활동을 위해 고잔동에 머물고 있다는 이현재 목사(60)는 “이번에 변을 당한 학생들 중에는 버스기사 아버지와 정신지체 어머니를 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에게만 의지해 살던 남학생도 있다. 남편 잃고 아들만 바라보며 살던 어머니도 있다. 다들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저 자식 잘되기만 빌고 빌면서 어렵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단원고교 옆 명성교회에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살아 돌아오기를’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교회 신도 7명의 아이들이 세월호에 탔다가 다섯이 실종자로 분류됐다. 사고가 난 지 닷새 만인 20일 새벽에서야 겨우 물 밖으로 한 명이 건져졌는데 이 교회 관리실에서 근무하는 양모 씨의 딸(17)이었다. 한 교인의 말이다.

“양 씨는 교인들 사이에서 ‘딸 바보’로 불렸다. 매일 등하교하는 딸을 사무실에서 볼 수 있다고 좋아했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오후 4시가 되면 항상 현관에 나와 딸 찾기에 바빴다. 매주 일요일 교회예배 반주를 했던 딸은 교회의 자랑이었다. 근처 안산제일교회에 다니는 아이들 7명도 실종된 상태라고 들었다.”

고잔1동은 한마디로 거대한 슬픔의 동네였다. 단원고교 학생이 많이 타고 내리던 올림픽기념관 버스 정류장도, 학교로 들어서는 골목 초입에 있는 동그라미 분식집도, 슈퍼도 모두 비탄에 빠졌다. 한 주민은 “요즘 이곳 사람들은 ‘별일 없으시죠’라고 말하거나 혹은 의미가 담긴 눈인사를 건네는 것이 인사법”이라며 “서로 안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길에 무작정 붙들고 서서 울면서 하소연하는 게 일”이라고 했다.

고잔1동 바로 옆 와동 ‘상하세탁소’ 주인은 “수학여행 출발 전날인 14일 2학년 아이들이 몰려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과 새로 산 청바지를 수선해 달라며 맡겼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혜승 fineday@donga.com·서동일·김성모 기자   

※이 기사는 목지선 인턴기자(성신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도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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