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미술학원장 정영규씨가 본 광고천재 이제석의 청년시절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된 이제석 씨가 지난달 서울 마포구 상수동 인근 작업 현장에서 활짝 웃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정영규 대구 제3미술학원 원장
며칠 나오다 말겠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장짜리 스케치 숙제를 내주면 녀석은 스무 장, 서른 장을 그려왔다. 한번 쓴 붓으로 다른 색을 칠하려면 그것을 물에 씻고 걸레에 몇 번 닦아야 한다. 그런데 제석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시커먼 물에 담갔다 꺼낸 붓을 입으로 쭉쭉 빨아가며 그림을 그렸다. 오래도록 굶주리다 먹이를 발견한 야생동물처럼 무섭게 몰두했다.
제석이는 조금만 관심을 보여주면 10배의 노력으로 화답했다. 공부 좀 하라고 말하곤 했는데, 하루는 녀석이 “쌤(선생님), 저 공부 한번 해볼까요?”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제석이는 푸른색 교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손바닥 크기의 영어 단어장을 넣고 다녔다. 이후 쉬는 시간에 연필로 쓴 단어장을 빼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석 달쯤 지났을까. 단어장을 얼마나 많이 넣었다 뺐다 했는지 교복 왼쪽 가슴 부위가 새까매져 있었다. 교복을 빨아 입어 다른 데는 깨끗해도 그곳만은 언제나 까맸다.
제석이는 대학에서 매 학기 전 과목 A+를 받았다. 실력도 좋았지만 가정형편상 장학금이 생명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석이에게 학원 보조강사 일을 맡겼다. 가끔 다른 학원에서 특강 요청이 오면 제석이를 대신 보냈다. 학부 1, 2학년생이 미술 강사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런데도 제석이는 고작 두세 살 어린 학생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제석이가 보조강사를 그만둔 얼마 뒤 나는 시내에서 놀라운 광경을 봤다. 반바지 차림의 청년이 굴러가는 게 신통할 정도로 낡은 연탄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주워온 듯한 작은 헬멧은 머리 위에 엉거주춤 걸쳐져 있었다. 제석이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려 영어학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학원은 대구에서 수강료 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녀석은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버려진 오토바이를 주워 탄 것이었다. 제석이는 그렇게 눈물나게 유학비용을 모았다.
몇 년 뒤 나는 TV 9시뉴스에서 제석이를 봤다. 세계적 광고제인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공장 굴뚝을 권총으로 묘사한 광고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PC방 컴퓨터로 그 뉴스를 봤는데, 앉은 자리에서 오전 3시까지 인터넷을 뒤지며 관련 뉴스를 보고 또 봤다. 다른 제자나 강사들한테 얘기하면 괜히 질시를 받을까봐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기뻐했다. 사람들은 제석이를 ‘광고 천재’라며 놀라워했지만 나는 그 결과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녀석은 광고 천재라기 보단 ‘노력 천재’였다.
제석이가 광고전문가로 커가는 동안 나는 학원 원장이 됐다. 다른 미술학원 원장들은 수업에서 손을 떼고 경영에만 신경 쓰지만 나는 그러질 못하고 있다. 강의실에서 아이들과 계속 부대끼다 보니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갔다. 이게 다 제석이 때문이다. 녀석은 요즘도 불쑥 전화로 “쌤, 뭐해요?”라고 묻는데 나는 “쉰다”고 하고 싶지가 않다. “쌤은 수업하다 바닥에 엎어져 그림 그릴 때가 제일 멋져요”라는 제석이의 오래전 한마디는 내 삶의 지표가 돼버렸다.
언젠가 제석이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쌤, 야구 하면 누가 떠오르세요?” “박찬호.” “축구는 누가 떠올라요?” “박지성.” “광고 하면은요?” “….” “저는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석이는 ‘광고의 아이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의 명성이면 적당히 해도 먹고살 텐데 아직도 남들이 안 가는 힘든 길을 가려는 건 그 목표를 위한 몸부림인 것 같다. 제석이는 까까머리 학생 때부터 판을 새로 짜는 방식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만의 룰을 만들어갈지 나는 응원하며 지켜볼 것이다.
정영규 대구 제3미술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