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피해가족을 살펴라] “우왕좌왕 대처, 21년간 나아진게 없어” “그땐 그래도 선장이 배 지켰는데…”
1993년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때 목숨을 건진 박병길 씨(72·사진)는 세월호 참사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22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21년이 지나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다니…어휴, 이러고도 선진국이 됐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원…”이라며 답답해했다.
1993년 10월 10일 박 씨는 부인(63)과 함께 서해훼리호 갑판에 있었다. 부부 6쌍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오전 10시 20분경 위도를 출발해 격포항으로 가던 배 오른쪽에서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집채만 한 파도에 부딪힌 배가 붕 떠오르더니 선체 오른쪽이 45도 가까이 가파르게 기울면서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박 씨는 “30여 분이 1년보다 더 길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바닷물이 차가워서인지 체온이 떨어져 덜덜 떨리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스박스 등을 붙잡고 버티던 사람들의 입에선 하얀 거품이 나왔다.”
함께한 6쌍 중 박 씨 부부와 다른 한 친구 부부를 제외하고 8명이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박 씨는 그날의 악몽이 떠오를까봐 사고 뒤 10년 동안 바다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배를 탔을 때도 심한 어지럼증으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박 씨는 며칠 전 TV를 시청하다가 세월호 침몰 사고를 접하고는 화부터 치밀었다. 그는 “21년 전보다 나아진 게 전혀 없더라. 그래도 그때는 선장이 마지막까지 배를 지켰는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사건의 원인은 화물 과적(過積), 악천후, 운항 부주의 등으로 비슷했다. 다만, 서해훼리호 선장은 이번 사건과 달리 최후까지 승객들의 구조를 요청하다 침몰한 배 안 통신실에서 숨졌다.
박 씨는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며 “구조대원들이 빠른 물살 등으로 너무 고생을 하지만 애타는 실종자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