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 스님(청주 마야사 주지)
동아일보DB
덕분에 어지럽던 뒤쪽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는데, 이 일은 석공의 힘을 빌리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웠던 내 솜씨를 발휘했다.
들쑥날쑥 울퉁불퉁한 돌을 앞줄 아귀를 맞추어서 놓으니까 반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못생긴 돌이라서 석공에게 천대받던 돌이 비로소 제자리에 쓰이게 된 것이다.
현진 스님(청주 마야사 주지)
예전에 원로 스님들의 모임이었던 여석회(餘石會)가 있었다. 여석회에는 성철, 구산, 자운, 관응, 석암, 탄허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정확한 명칭은 축성여석회(築城餘石會)다. 축성여석, 말 그대로 성을 쌓고 남은 돌이라면, 아무도 거들떠보거나 관심 가지지 않는 돌이다. 성을 쌓는 돌에도 끼지 못했으므로 이른바 쓸모없는 돌이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이 사회의 외톨이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남은 돌처럼 살자는 의미에서 이 모임을 결성했다는 후문이다. 성공이나 경쟁의 중심에서 벗어나서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겠다는 서원이라서 그 의미가 예사롭지는 않다.
돌도 그렇듯이 각자의 개성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질서가 된다. 서로의 특징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 어긋나지 않는 미(美)의 율동이 살아난다. 봄날에 피어나는 꽃들이 서로 닮으려 하지 않으므로 울긋불긋 꽃 천지를 이루는 이치와 같다.
이 땅에 마음껏 물감을 풀어내는 수목들처럼 서로의 개성이 어우러져야 차별이 있지만 아름다운 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획일적인 것은 재미없다. 이런 차별적 조화를 모르고 획일적으로 닮아가려는 세태를 일러 장자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훈수를 두었다.
부처님오신날에 등불을 켜는 풍경도 획일적이지 않아야 어둠을 밝히는 본래의 뜻이 더 선명해질 수 있다. 큰 등과 작은 등이 어울리고 분홍등, 노란등이 내걸리고, 연꽃등, 팔모등, 수박등이 환하게 불을 밝혀야 등불의 조화가 찬란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등이 비닐 제품이 아니라 손으로 만들어진 지등(紙燈)이라면 소박한 아름다움도 배어 나올 수 있겠다.
근래에는 전기가 등불을 대신하고 있는 추세지만 촛불로 등을 밝히는 야경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절에서는 한지로 등을 만들고 촛불로 어둠을 밝히는 것을 매년 고집하고 있다.
부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가? 교리적으로는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로 하강하셨다 하였지만 도솔(兜率)의 본뜻은 만족할 줄 아는, 지족(知足)이다.
그러므로 시샘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면서 만족할 줄 아는 삶이 곧 부처님 세상이라는 가르침이다. 지족이 부처님의 세계라면 자비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이 지족과 자비는 동의어다. 불탄일을 수없이 맞이하여도 이것을 잊으면 교양 없는 비불자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은 그 어디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비심에서 탄생하셨다. 이런 입장이라면 스스로에게 자비심의 유무를 먼저 물을 수 있어야 참다운 봉축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자비지수(慈悲之數)는 얼마쯤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