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관 느린 공에 왜 쩔쩔매나
두산 왼손 투수 유희관(왼쪽)은 ‘국보 투수’로 통했던 선동열 KIA 감독(오른쪽)처럼 최대한 몸을 앞으로 끌고 나와 부드럽게 공을 던진다. 유희관은 “선 감독님과 비교하면 나는 ‘발톱의 때’ 수준”이라고 겸손해했다. 동아일보DB
선 감독처럼 시속 150km를 던질 것 같지만 유희관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다. 이를 악물고 던져도 140km가 채 나오지 않는다. 올해 던진 가장 빠른 공은 136km. 직구 평균은 132km 내외다. 타자들이 “딱 치기 좋은 공”이라고 말하는 구속이다.
그런데도 타자들의 방망이는 헛돌기 일쑤다. 서서 삼진을 당하는 타자도 많다. 23일 현재 유희관의 성적은 2승 무패, 평균자책점 1.91이다. 평균자책점은 전체 투수 중 1위다.
선수와 심판, 팀 관계자들의 대답을 정리하면 이렇다. 스피드건에 찍히는 숫자는 분명 느리지만 실제로 보이는 공은 결코 느리지 않다. 투수와 포수 간의 거리는 18.44m다. 투수는 공을 던질 때 투구판을 밟고 한 발을 앞으로 쭉 뻗어서 던지기 때문에 실제 공이 날아가는 거리는 1m가량 줄어든다. 그런데 유희관은 몸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와서 던져 0.5m가량 더 준다.
요즘 프로야구에서는 160km의 강속구도 한가운데로 몰리면 얻어맞기 일쑤다. 140km대 초중반의 스피드는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4가지 구종(직구,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자유자재로 던지는 유희관은 자신의 스피드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안다.
오른손 타자를 상대할 때 그가 삼진을 잡아내는 가장 일반적인 패턴은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에 걸치는 체인지업을 던진 뒤 몸쪽에 붙는 직구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것이다. 전광판에 찍히는 스피드는 130km 중반이지만 타자에게는 훨씬 빠르게 느껴져 타자들은 방망이도 휘둘러보지 못한다. 이 공에 삼구삼진을 당한 한 선수는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마치 160km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한 심판원도 “만만하게 보이는데 막상 치려고 하면 한가운데로 몰리는 공이 거의 없다. 직구와 20∼30km 정도 속도 차이가 나는 변화구를 던진 뒤 몸쪽 직구를 꽂으면 속수무책이다”고 했다.
지난해보다 한층 좋아진 것은 왼손 타자 상대 성적이다. 지난해 그의 왼손 타자 피안타율(0.332)은 오른손 타자(0.221)에 비해 1할 이상 높았다. 올해는 오른손 타자에게 주로 쓰던 체인지업을 왼손 타자에게도 사용하면서 오른손 타자(0.221)건 왼손 타자(0.212)건 가리지 않고 잘 잡아낸다. 그리 빠르지 않은 공으로 메이저리그에서 305승을 따낸 전설적인 왼손 투수 톰 글래빈은 “야구를 향한 내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유희관의 강속구도 스피드건에는 찍히지 않는다. 다만, 타자들의 눈에 빠른 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