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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상훈]불감증 공화국

입력 | 2014-04-25 03:00:00


이상훈 경제부 기자

지난해부터 잇따라 터지는 금융 사고를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바로 ‘불감증(不感症)’이었다.

금융회사의 내부통제가 무너져 ‘안으로부터의 위기’가 발생하는데도 금융당국과 금융사, 내부 임직원들 모두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 초 나라를 뒤흔든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이 대표적이다. 무분별한 개인정보 수집 관행과 정보보호에 대한 무관심, 허술한 보안규정, 당국의 관리감독 소홀 등이 빚어낸 총체적 인재(人災)였는데도 정부 고위 당국자는 “정보 제공에 다 동의하지 않았느냐”라며 안이한 인식을 드러내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겉으로는 외주업체 직원이 개인정보 파일을 빼내다가 걸린 사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개인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보안 불감증이 부른 재난이었다.

일련의 은행권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대기업 직원이 가짜 법인인감으로 수천억 원대의 사기대출을 받은 사건부터 개인의 막도장으로 허위 서류를 만드는 등의 질 낮은 범죄가 연달아 터지면서 윤리 불감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5만여 명의 개인 투자자에게 부실 채권을 팔고 주가 조작까지 벌인 동양그룹 사태는 기업 오너의 도덕 불감증이 얼마나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온 나라를 비탄에 빠뜨린 세월호 침몰사고도 다를 바 없다. 선장과 직원들이 원칙을 무시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 사고가 커졌다는 점에서, 적어도 구조적 원인만큼은 일련의 금융사고와 궤를 같이 한다.

무엇보다 사고를 낸 당사자들이 ‘윤리 불감증’에 빠져 직업소명을 팽개친 부분이 빼닮았다. 금융사 직원이 허위 입금확인서를 만들고 고객정보를 외부로 빼돌린 것은 신뢰가 생명인 금융윤리의 기본을 부정한 것이다. 선장이 승객을 내팽개치고 제일 먼저 구조선에 올라 탄 것은 세계 항해사(史)에서 드문 범죄행위다.

안전 불감증, 낙하산 인사 불감증도 오랜 고질병이다. 청해진해운이 ‘관행’이라며 안전검사표를 허위로 작성해 보고한 것은 금융사들이 당국에 ‘보안에 이상 없다’는 안이한 검사결과서를 제출한 것과 다를 게 없다.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는 허술한 감독체계나 관피아(관료 마피아)로 대표되는 낙하산 인사도 닮았다. 사고가 터진 뒤에야 우왕좌왕 대책마련에 나서면서 뒤늦게 관련분야 업체를 전수 조사하는 것까지 비슷한 모습이다.

불감증이 만연한 곳은 금융과 해양뿐이 아니다. 입석 승객을 가득 태우고 시속 100km로 달리는 광역 좌석버스부터 아파트단지 소방도로를 가로막은 주차 차량, 아무 안전조치 없이 액화석유가스(LPG) 통을 함부로 다루는 노점상까지 우리 주위에는 언제라도 참사를 부를 수 있는 불감증 현장이 널려 있다.

‘혁명’ ‘엄단’ 같은 자극적 단어를 앞세운 고위 당국자의 지시만으로는 미봉책도 마련하기 힘들다. 얼마나 더 끔찍한 사고를 겪어야 ‘불감증 공화국’이란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이상훈 경제부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