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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命]권노갑 회고록뺄셈정치 vs 덧셈정치

입력 | 2014-04-26 03:00:00

“비선의 전횡, 근거 있습니까” 강경파에 따져 묻자…




2002년 5월 월드컵 경기에 환호하고 있는 민주당 김민석 서울시장 후보와 노무현 대통령 후보. 권노갑 고문은 김민석의 서울시장 출마에 대해 “너무 빠르다. 정책위의장과 원내총무 등의 경력을 쌓고나서 하라”고 권했으나 김민석은 출마를 강행했다. 동아일보DB

○합리적인 운동권 출신

김민석 의원은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전국학생총연합 의장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에 맹렬히 저항했던 운동권 출신이다.

운동권 출신들이 거칠고 모나며 급진적이고 과격한 인물이 많은데 비해, 김민석 의원은 돌출행동을 하거나 모가 안 나고 부드러우며, 선배 정치인을 존경하고 후배 정치인을 존중하는 합리적인 젊은이였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당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 정치노선도 온건한 중도세력이라는 점이 나의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노력하고 공부하는 정치인이었다.

나는 똑똑하고 논리적인 그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보고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되도록 김대중 총재와 가까운 곳에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했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다가 1999년에는 국민회의 총재특보, 민주당 대변인, 그리고 2000년에는 민주당 총재비서실장을 하다가 16대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워크숍에서의 발언

2000년 말 정동영 최고위원이 청와대 회의에서 나의 2선 퇴진론을 주장함에 따라 내가 2선으로 물러났는데, 다음 해 5월 24일에는 그가 속한 ‘바른정치 실천모임’의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이 당정쇄신론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며칠 후 정동영 최고위원이 그 성명서를 지지한다고 나섰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5월 31일 민주당 워크숍이 열렸을 때 성명서에 서명한 의원들이 내가 당을 전횡한다는 비판을 주도해 나갔다.

이때 김민석 의원이 단상에 올라 반대논리를 폈다. 그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당을 쇄신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개혁을 마무리해야 할 집권당이 규율을 유지하고 대오를 지키는 절차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서명파 의원들의 절차를 무시하는 행동 속에 담긴 본질은 어떤 특정인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전제한 뒤, 당을 이끌고 있는 것은 김중권 대표이며, 대표를 보좌하는 최고위원들과 사무총장이 있는데 어떻게 비선이 당을 좌지우지하고 국정혼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역설했다.

○포말 정당

그 후 김민석 의원은 나를 옹호했다는 것 때문에 ‘바른정치 실천모임’의 구성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불이익을 감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서명파 의원들은 윗선을 공격함으로써 자기들의 위치를 올린다는, 좋지 못한 하극상 정치를 택했다. 이들은 그 후 노무현 정권이 탄생할 때는 민주당을 둘로 쪼개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이 새로 만든 열린우리당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좋은 정치는 하극상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적어도 내가 배운 정치는 그렇다.

2002년 김민석 의원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되어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와 맞붙었고, 이 선거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열심히 지원유세를 했으나 결국 낙선하고 말았다.

○단일화의 주역

김민석 의원은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추락하고, 정몽준 의원의 인기가 치솟을 때 정몽준 캠프로 건너가서 선거운동을 했다. 그 시점에서는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너무 추락했기 때문에 민주당 안에서 노무현 후보로는 승산이 없다는 의견이 팽배했으며, 따라서 김민석 의원처럼 정몽준 캠프로 옮겨간 의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의 대선가도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 이회창 후보와 대결하려면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가 절실했다.

이 단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노무현 캠프의 신계륜 의원과 정몽준 캠프의 김민석 의원이었다.

김민석 의원은 노무현 후보를 떠나 정몽준 캠프로 건너갔지만, 그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를 단일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2002년도의 대선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러나 김민석 의원으로부터 개혁세력의 단일화를 위해 애썼던 사정을 나중에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의 주역들과 등지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김민석 의원은 단일화의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민주당에 남았고, 대통령 탄핵역풍을 맞은 17대 총선에서 서울 영등포 갑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40여 년간 정치일선에 있었던 나의 경험으로는 김민석 의원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앞으로 큰 정치인이 될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덧셈정치를 할 줄 아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감옥에 있으면 담장 밖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이 이 사람 저 사람 생각난다. 악연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나를 어렵게 한 사람 가운데는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씨가 있다. 

▼ “얘기 다 들었어, 정말 잘했어” ▼
DJ, 청와대로 김민석 의원 불러


새천년민주당 총재인 김대중(DJ) 대통령은 김옥두 사무총장으로부터 2001년 5월 31일의 당 워크숍 상황을 상세히 보고받았다.

김 대통령은 김 총장에게 김민석 의원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여당 사무총장은 매주 한 차례 청와대에서 주례보고를 했다.

“얘기 다 들었어. 정말 잘했어.”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김민석은 권노갑 의원이나 동교동계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워낙 유명한 학생운동권의 스타였기 때문에 DJ가 직접 영입한 경우였다. ‘바른정치 실천모임’의 멤버 대부분이 15대 총선(1996년)을 거쳐 정치에 입문했지만, 김민석은 14대 총선(1992년) 때 최연소 후보자로 출마한 ‘정치 선배’였다. 27세의 김민석 후보는 서울 영등포에서 57세의 민자당 나웅배 후보와 겨뤘다. 재무부, 상공부 장관, 그리고 경제부총리를 거쳐 민자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던 거물이었다. 선거는 패배했지만, 나웅배와의 표차는 불과 360표였다.

같은 해 말에 있었던 14대 대선 때는 DJ의 청년특위 부위원장을 맡아 ‘물결유세’를 이끌었다. 위원장은 노무현. 권노갑은 물결유세단에 3억 원을 지원했다. 대선이 끝난 뒤 노무현이 1억2000만 원을 반납했다.

권노갑의 기억. “선거를 치르고 단돈 10원이라도 남았다고 가져오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선거에 이겼으면 모를까 도저히 그냥 쓸 수가 없었다’며 돈을 반납했다.” 그런데 기억력 좋은 권노갑도 그 당시 물결유세단을 이끈 ‘투 톱’ 중 한 명이 김민석이었다는 사실은 깜빡한 듯하다.

여하튼 김민석은 정풍운동을 겪으면서 ‘동교동계의 막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고, 정동영 그룹과는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는 노무현과도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10월 17일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민석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해 정몽준 후보 진영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는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였다. 손을 잡고 지원유세를 했던 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평범한 국민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지기는 했지만, 그는 밝은 내일이 약속된 개혁진영의 촉망받는 젊은 정치지도자였다.”

당시 김민석의 정치적 우선순위는 분명했다. 절대 이회창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당내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는 면면들로 볼 때 별다른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고, 동교동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민석은 마지막으로 김근태 의원(2011년 작고)에게 결단을 호소했으나 답이 없었다. 정몽준과는 전화 한 통 해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결국 김민석 스스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도 김민석의 벼랑 끝 고뇌를 이해했던 것일까. 자서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마도 후보단일화를 해야만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충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정치적으로 좋은 결과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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