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디자인 경영]<1>한국기업, 불황에도 투자 늘려 한국기업들 ‘新 디자인 경영’ 글로벌 전쟁
삼성전자는 이르면 상반기에 9번째 해외 디자인연구소인 중국 베이징 디자인연구소를 연다. 삼성전자는 이미 2004년 상하이에 디자인연구소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이번 베이징 디자인연구소는 베이징 지역에 초점을 맞춰 시장 트렌드와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최근 경기 화성시 남양종합기술연구소 단지 안에 기아자동차 전용 디자인센터를 준공했다. 그동안 기아차는 현대차와 같은 공간에서 디자인센터를 운영했지만 이번에 별도 건물로 독립하는 것이다.
○ 10년 만에 주요 기업 디자인 인력 약 2배로 증가
많은 한국 기업들은 2014년을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용 절감에 나서는 곳도 많다. 하지만 대기업들 상당수는 디자인 관련 인프라와 인력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정경원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많은 산업에서 빠르게 기술 평준화가 이루어졌고 기술 혁신을 계속 보여주는 것도 어려워지고 있다”며 “기업들로서는 디자인을 통한 제품 차별화와 브랜드 강화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디자인 경쟁력 강화 움직임은 관련 인력 규모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삼성전자의 경우 2005년 600여 명 수준이던 디자인 관련 인력이 현재 1300명을 넘어섰다. 10여 년 만에 조직 규모가 2배 이상으로 커진 것이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디자인 인력을 보유한 회사로 꼽힌다.
현대·기아차와 LG전자의 디자인 인력 수도 뚜렷한 증가 곡선을 그리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2005년 470여 명이었던 디자인 인력이 최근 750여 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LG전자도 460여 명이던 디자인 인력이 600명을 넘어섰다.
○ 시장 선도자 지향하는 한국 기업들
국내 글로벌 기업들은 디자인 부문에서 ‘시장 선도자’(퍼스트 무버)를 지향하는 상황이 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해외 기업들의 기술력을 따라잡은 데 이어 이제는 디자인 분야에서도 ‘빠른 추격자’(패스트 팔로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기업들의 시장 영향력이 큰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여러 가지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출시한 ‘갤럭시S5’의 후면 디자인이 대표적이다. 갤럭시S5는 후면에 미세한 구멍을 뚫은 ‘타공 패턴’을 처음 적용했다. 제품이 공개된 직후 ‘특이하다’ ‘신선하다’ ‘어색하다’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 “외형 위주 벗어나 소비자 경험 담아내야” ▼
나건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는 “여러 의견이 나올 만큼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디자인 역량에 대한 경영진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 커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김영준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전무는 “1990년대까지는 좋은 모양을 벤치마킹하고 소비자 요구를 반영하는 데 디자인 전략의 초점을 맞췄지만 이제는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 소비자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 디자인경영의 한계
하지만 국내 기업의 디자인 수준이 특정 부문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됐을 뿐 종합적인 디자인 경쟁력은 여전히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상당수 국내 기업들은 디자인경영이라고 하면 여전히 제품의 겉모습을 멋있게 바꾸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미국 파슨스스쿨의 에린 조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시각적 디자인에선 충분히 글로벌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소비자 경험을 담아내 이들의 행동을 바꾸고 나아가 새로운 시장과 제품을 창조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디자인경영을 완전히 새로운 제품과 시장을 만들어내는 혁신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소니의 ‘워크맨’이나 독일 BMW의 ‘키드니 그릴’같이 기능과 모양에서 모두 혁신 사례로 인정받는 제품이 아직 한국 기업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조 교수는 “제품의 외형 차별화만으로 시장 영향력을 키우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새로운 소비자 경험을 디자인할 수 있어야 새로운 시장도 발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선 단기 성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나 교수는 “원천기술 개발에 오랜 시간의 투자와 노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처럼 디자인도 자타가 모두 인정할 수 있는 혁신 사례가 나오려면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중견·중소기업들의 디자인경영 인식이 대기업에 비해 크게 부족한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의 경우 사내에 디자인 인력을 고용했거나 정기적으로 외부 디자인 전문기업과 업무를 진행하는 비율이 14%에 불과했다.
이세형 turtle@donga.com·박창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