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국제부 기자
철학자 해나 아렌트의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3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십수 년의 추적 끝에 아르헨티나에서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을 체포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그는 공개재판에서 “윗선의 명령을 따랐을 뿐 아무 잘못이 없다”며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대중은 이 뻔뻔함보다 인간 아이히만에 더 놀랐다. 약 600만 명을 죽인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나 잔혹한 살인마가 아닌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친절한 평범한 중년 사내였다. 그를 진찰한 여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의사 자신보다 더 정상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세월호 침몰로 우리는 여러 형태의 아이히만을 또 만났다. 아이들을 남겨놓고 먼저 도망치자마자 젖은 돈부터 말린 이준석 선장, 승객 구조할 시간이 없었다더니 옷까지 갈아입고 탈출한 선원들, 참척(慘慽)의 고통에 절규하는 학부모 앞에서 장관 사진부터 챙긴 공무원, 비정한 세월호의 진짜 주인, 무능한 정부와 대통령, 오보를 남발해 불신과 혼란만 키운 언론…. 모두 누군가에겐 다정한 연인, 자상한 부모, 마음씨 좋은 이웃일 것이다. 딱히 악을 행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자신이 무심히 하는 일에 숙고와 성찰이 없었던 이들의 철저한 무사유가 꽃 같은 어린 생명들을 수장시키고 그 가족까지 두 번 죽였다.
세월호의 아이히만을 비판하는 우리는 또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 내가 세월호 승무원이라면 “이준석 선장이 아니라 고 박지영 씨처럼 승객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당당히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이 글을 쓰는 기자부터 얼굴이 화끈거린다. 감당할 수 없는 불의(不義)와 마주했을 때 이를 멈추는 첫걸음은 나부터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 하나 달라진다고 뭐가 바뀔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핑계로 일상에 묻혀버리면 평범하고 선량한 우리도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형 사고가 또 터지면 단지 과거와 비교하기 위해 세월호 얘기를 할 것이다.
우리는 악과 불의에 대해 제대로 사유하고 있는가.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