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안전 대한민국’ 이렇게 만들자] <4> 안전은 최선의 투자다
[1] 지난달 29일 학원 7곳이 입주해 있는 건물 비상계단에는 학원이 학생의 무단 외출을 막기 위한 명목으로 설치한 줄이 통행을 막고 있다. 방화문도 자동잠금장치가 풀린 채 열려 있다. [2] 인근 건물의 비상계단은 플라스틱 상자들이 통행을 막고 있다. [3] 이마트 용산점에선 비상구 앞에서 시식행사가 진행 중이다. 긴급한 상황에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4] 평화시장 상가에선 소화전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화물 등에 가려져 있다. 김호경 whalefisher@donga.com·한우신·강홍구 기자
본보는 29일 방재 전문가와 함께 하루 수천 명이 이용하는 서울 시내 대형마트, 의류 쇼핑몰, 재래시장, 학원 건물 등을 찾아 재난 대비를 점검했다. 김근영 강남대 도시공학과 교수,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소방서 관계자 등이 참여했다.
○ 미흡한 대피로 안내
다중이용업소는 눈에 잘 띄는 곳에 피난 안내도를 설치해야 한다. 지하 1, 2층에 들어선 이마트 서울 용산점에서 이를 찾기 힘들었다. 어렵사리 찾은 안내도에 나온 대피로 지도의 크기는 A3용지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지만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현재 위치’ 표시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게다가 안내도가 방화벽 바깥쪽에 있었다. 불이 나 방화벽이 내려오면 안에 갇힌 사람들은 안내도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동대문의 대형 의류 쇼핑몰인 밀리오레와 두타에서는 비상구를 안내하는 비상등의 위치가 잘못돼 있었다. 비상등이 방화벽 바깥쪽에 설치된 것. 불이 나서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방화벽이 내려오면 안에서 밖으로 대피하는 사람들은 비상등을 볼 수 없다. 이창우 교수는 “손님이 비상등에 의존해 길을 찾는다면 도리어 불이 번지는 안쪽으로 갈 수도 있어 위험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밀리오레와 이마트 점포 바닥에 비상구를 안내하는 화살표가 없는 것도 아쉽다고 했다. 바닥 화살표는 불이 나서 연기가 가득 찬 환경에서 대피로를 찾기에 유용하다. 작은 옷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평화시장은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150m 길이의 복도에 비상등은 3개뿐이었다. 그마저도 천장에 매달린 가게 간판들과 겹쳐 잘 보이지 않았다.
○ 막혀 있는 비상구
대피로에는 장애물이 매우 많았다. 학원 7개가 입주해 있는 13층 건물의 비상계단 중간에는 통행을 막는 줄이 쳐져 있었다. 학생들의 무단 외출을 막기 위해 학원이 설치한 것이다. 긴급한 대피 상황에선 큰 걸림돌이 된다. 줄에 걸려 넘어진다면 여러 명이 한꺼번에 깔리는 사고의 위험도 크다.
이 건물 1층 비상구는 잠겨 있었다. 학생들이 비상계단을 걸어 내려와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7층짜리 학원 건물 외부에 설치된 대피용 계단도 무용지물이었다. 2층에 있는 음식점에서 쌓아놓은 플라스틱 박스가 계단 중간을 막고 있었다. 이마트에는 비상구 앞에 매대를 놓고 시식 행사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 숨어있는 소화전
불이 나면 대피와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것은 화재 진압이다. 화재 진압의 골든타임은 5분. 초기 진화가 안 되면 불은 급속도로 번진다. 소화전과 소화기가 중요한 이유다. 평화시장 내의 소화전은 상자와 현금자동입출금기가 가리고 있었다. 화재가 나도 무용지물인 셈이다.
밀리오레에서는 열린 상태로 고정된 방화문이 많았다. 학원 건물에서도 열려 있는 방화문이 많이 발견됐다. 방화문은 닫아 놓는 게 원칙이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방화문이 열려 있으면 연기가 빠르게 확산된다. 이 교수는 “열어놓은 방화문을 통해 비상계단으로 연기가 퍼지면 대피하는 사람마저 질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방화문을 열고 나가면 또 방화문이 있는데, 이는 두 개의 문 사이에 작은 공간을 임시 대피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연기를 빨아들이는 장치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방화문이 열려 있으면 이곳이 연기로 가득 차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 매뉴얼은 허점 투정이
사고 대응 매뉴얼에도 허점이 많았다. 이마트는 사고 유형을 크게 4가지(화재, 풍수해, 강도 절도 등 테러, 사망 사고)로 구분하고 사고 정도에 따라 3단계로 나눈다. 소방관이나 경찰관을 부르는 것은 2단계부터다.
그런데 점포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점장이 2단계 이상이라고 판단하면 본사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본사는 보고를 받고 사고 단계를 다시 판단한다. 김 교수는 “현장에서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는데 현장을 보지 않은 본사에서 상황을 심각하지 않게 보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매뉴얼이 있더라도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다. 사고 시에 이마트 용산점의 3개 고객서비스팀은 구역별로 대응을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과거 2개 팀 체제일 때의 매뉴얼을 고치지 않는 바람에 3번째 팀장의 역할은 매뉴얼에 담기지 않았다. 당장 개선이 필요한 내용도 눈에 띄었다. 이마트의 ‘비상 상황 대처 요령’을 순서대로 보면 4번이 ‘복구반 투입’, 5번이 ‘고객 대피’다. 전문가들은 당연히 고객 대피가 먼저인데 뒤바뀐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 정리-사고 흔적 제거, 필요 시 임시 가림 조치’를 하라는 내용도 있다. 사고 흔적을 제거하라는 것은 경찰 수사에 필요한 증거를 없애라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문제다.
한우신 hanwshin@donga.com·강홍구·김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