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0년대 학번이고, 외환위기를 대학에서 맞았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은, 우리의 취업난을 가련해했다. 하지만 지금의 20대들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세대였다. 적어도 열심히만 하면 취업은 할 수 있었다. 비정규직, 인턴사원이란 말이 지금처럼 익숙한 사회도 아니었다. 요즘 초등학생 장래 희망엔 정규직까지 등장했단다. 학교, 학원, 또 학원.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데도 정규직조차 힘든 세상. 정규직이 돼도, 끝이 아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내 친구들 가운데도 벌써 명예퇴직을 권고받은 친구가 있다. 살아남는 게 더 어려운 시대다. 퇴직 후 노후의 삶은 더 무섭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하루 평균 42.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그중 청소년과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다. 그들의 나약함만을 탓하기엔, 우리는 지나칠 만큼 약자에게 가장 가혹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OECD 국가인데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은 있겠지, 라는 믿음조차 흔들리는 요즘이니까.
지난 몇 주, 가슴 아픈 뉴스들을 보면서 그중 가장 아프게 들렸던 말은 이거였다.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고. 노후한 선박, 무리한 증축, 지켜지지 않은 안전규칙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시스템. 그리하여 사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사고 직후, 스스로 배를 탈출한 사람 174명 외에 우리는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을 기다리며 깨달은 건, 도리어 처음 살아 남아준 174명이 기적이었다는 것. 우왕좌왕한 구조상황을 지켜보며, 이런 상황에서 살아 남아준 분들이 도리어 기적처럼 느껴졌다. 고맙게 느껴졌다. 살아남는 건, 아니 사는 건 당연한 일이어야 하는데. 더 잘살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그냥 ‘사는 건’ 당연한 일이어야 하는데. ‘사는 것’이 도리어 고맙고 기적이라니.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조차 장담할 수 없는 세상. 살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노란 리본에 이런 말을 담은 거다. 미안합니다. 사는 게 당연한 건데, 사는 게 기적이 되어 버린 세상. 지금도 하루 평균 42.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강세형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