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가족 심정으로 슬픔과 눈물…상실은 슬픔보다 분노 더 야기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7일째인 4월 22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선착장에서 한 실종자 가족이 친지들의 위로를 받고 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언론보도를 지켜보는 수많은 국민이 함께 분통을 터뜨렸고, 함께 슬퍼했으며, 함께 넋을 놓았다. 이른바 집단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필자에게 진료받는 많은 우울증 또는 불안장애 환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 아이가 타고 있었다면…
공황장애를 앓는 한 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까지 제가 비행기를 타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배도 무서워서 못 탈 것 같아요.”
장기간 우울증을 앓는 한 환자는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데 불쌍한 어린 학생들이 대신 죽은 것 같아 하루 종일 기분이 너무 우울하다”며 증상 악화를 호소했다. 집에서는 아내 또는 어머니가 슬픔에 잠겼고, 때로는 분통을 터뜨리며 많은 사람이 불면과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이나 아버지도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일하니 집중력이 저하된다고 호소한다. 대한민국 전체가 우울증을 앓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PTSD)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와 같은 증상을 겪는 것일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몇 가지 원인적 측면을 분석해보면, 함입(Incorporation·또는 합일화)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함입이란 ‘동일시’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좀 더 원초적이고 미숙한 단계의 방어기제다. 즉 동일시란 닮고 싶은 마음이 크게 작용하지만, 함입이란 자신도 모르게 대상에 동화되는 현상이기에 차이가 있다.
4월 23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단원고 희생자 임시합동분향소에서 헌화를 마친 단원고 학생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TV 화면에 비치는 세월호 침몰 장면과 신문에 보이는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 흘리는 모습이 마치 나 자신이 그 옆에 있는 듯한 느낌, 나아가 내가 그 부모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들과 내가 합쳐진 느낌이 무척 강하기에, 내 감정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일 내 아이가 저 배에 타고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이 단순한 가정에 그치지 않고, 마치 실제로 벌어진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 슬픔, 분노, 절망, 좌절 같은 감정이 연쇄반응처럼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무력감은 더욱 커지기만 한다. ‘부모인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니, 그러고도 내가 부모란 사람인가’ 하는 죄책감도 함께 작용한다. 자식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어찌 웃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단 말인가.
4월 23일 경기 안산 올림픽기념관 실내체육관에 처음으로 희생자 임시합동분향소가 마련돼 밤늦게까지 조문객 발길이 이어졌다.
무의식 속 恨이 출몰
많은 사람이 비난을 던지는 이의 생각과 태도를 내적 투사해 “맞아.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정말 너무해. 비난받아 마땅해”라고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결과적으로 긍정적 감정에 대한 억압이 이뤄진다. 더 나아가 즐거움과 기쁨을 억제하기까지 한다. 실종자 가족에게 함입하고, 주변 사람에게 내적 투사한 결과 우울과 무기력, 분노와 짜증, 불안과 공포가 나 자신을 휘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실종자 가족이나 주변 사람은 타인 아닌가.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이야 쉽다. 하지만 실제는 그리 쉽지 않다. 일단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 한국인 정서에 맞지 않는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그 사람을 못 본 척하고 나만 잘 지낼 수도 없다. 한국인의 고유한 일체감 또는 동질성 때문이다. 지금이야 다문화 혹은 다민족국가로 받아들여지는 대한민국이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단일민족이요, 한 핏줄을 강조하던 나라였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한민족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가치관이 매우 강하게 우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의 일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향한 대한민국 부모의 사랑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때로는 이와 같이 강한 자식 사랑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사회를 경쟁적 분위기로 만들며, 가족 이기주의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식은 부모에게 최고로 소중한 존재다. 그런 자식이 지금 위기에 처했고, 하나 둘씩 죽음을 맞는 이 상황에서 누구의 자식이 아닌 우리의 자식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집단우울증 및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을 겪는 마지막 이유는 ‘상실(Loss)’이다. 상실이란 말 그대로 어떤 것이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끊어지거나 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상실은 본래 우울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이제 앞으로는 저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된다니’라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 상실은 때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대한민국 재난대응 시스템의 부실, 리더의 책임감과 양심의 실종, 안전관리 부재는 우리가 마땅하게 지니고 있어야 할 ‘상식’과 ‘자부심’의 상실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실은 슬픔보다 분노를 더 많이 가져다준다. 그래서 우리는 더 힘들다. 슬퍼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분노까지 가슴속에 안고 가려니까 힘에 부친다.
몸 아프다는 사람 늘어나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생존자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에 시달리며 큰 슬픔을 겪었다.
그러기 위해 국민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치유법(Tip 참조)을 소개한다(출처 :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세월호 사건을 겪는 일반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안내문’).
정신적 치유법
1.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한다.
2.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에 집중한다.
3. 잠시 쉰다. 쉬면서 자꾸 힘든 생각이 떠오른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본다.
4. 운동이나 신체활동에 집중한다.
5. 믿을 만한 사람과 현재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눈다.
6. 자신의 감정반응이 지나치지는 않은지 살펴본다.
7. 종교가 있다면 기도한다.
8. 고통 또한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9. 기분이 나아지는 활동을 한다. 현실 도피적이거나 중독 관련 활동은 피한다.
10. 힘든데도 잘 버텨온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칭찬해준다.
11.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본다.
12. 현재 내게 소중한 사람과 가치를 생각해본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
● 눈물이 계속 나거나, 잠이 오지 않거나, 이전에는 즐겨 했던 일이 더는 재미없거나, 우울 혹은 화나는 감정 반응이 상당히 심할 때
●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들거나, 식욕이나 체중에 변화가 있을 때
● 모든 생각이 부정적이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등의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는 경우.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psysohn@chollian.net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4년 4월 30일자 93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