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 모두 지켜보고 품은 ‘고난의 門’
한양 사대문 가운데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문인 흥인지문(왼쪽). 본래 도성을 지키는 관문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성벽이 헐리고 전차가 지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서울시·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동대문은 1396년(태조 5년)에 건립된 뒤 1453년(단종 1년)에 중수됐고, 1869년(고종 6년)에 개축했다. 이 때문인지 동대문 인근에는 조선시대로부터 출발해 근대 전차와 운동장, 시장의 흔적, 최신식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600년 역사가 함께 겹쳐 있다.
흥인지문의 운명은 기구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뚫고 한양으로 입성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난 뒤 이 문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환궁했다. “나는 돌로 만든 문임으로 소위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는 것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철석인들 아니 녹고는 못 견디겠더이다.”(동아일보 1928년 4월 20일자 ‘동대문 팔자타령’)
동대문은 외적의 침입, 일제 강점기, 6·25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켰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옛 사람들은 흥인지문을 ‘동대문(動大門)’이라고도 불렀다. 몸을 움직여 나라의 격변을 예언하는 문이라는 의미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동대문 문루가 북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변고의 징조라며 쑥덕거렸는데 과연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군은 홍제동에서 기병해 세검정을 거쳐 북서쪽 문인 창의문(북소문)을 통해 들어왔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문루가 동남쪽으로 기울어졌다. 난리 당시 명성황후가 동대문을 빠져나가 장호원에 피신했는데 장호원은 동대문의 동남쪽 방향이다.
동대문이 움직인다는 것은 단지 속설만은 아니었다. 1983∼1986년 학자들이 조사해봤더니 해마다 10월이면 동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이듬해 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문루를 지을 때 수축·팽창률이 다른 목재를 섞어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동대문을 떠올리면 흥인지문보다는 청계천 주변 시장이나 DDP, 패션타운을 먼저 떠올리는 이가 많지만 600년 본래 주인도 기억해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속으로 동대문 주변 높은 건물을 하나씩 지워 가면 고요한 중세 도시 한양이 차츰 눈앞에 보일지 모른다.
시가 발간한 한양도성 스토리텔링 북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를 보면 한양도성에 관한 이야기 100가지를 접할 수 있다. 서울스토리 홈페이지(seoulstory.org), 서울시 관광정책과 02-2133-2817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