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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희균]오키나와의 기관사

입력 | 2014-05-07 03:00:00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일본 최남단 휴양지 오키나와 도심에는 유이레일이라는 지상철(地上鐵)이 다닌다. 두 량짜리 작은 객차가 15개 역을 왕복하는 단일노선이다. 놀이동산 모노레일처럼 단순해서 사고가 나려야 날 수 없어 보인다.

앞 칸에 타면 운전석과 연결된 유리창 너머로 기관사의 모습이 훤히 보인다. 기관사는 역마다 타고 내리는 이가 없어도 직접 플랫폼에 내려 상황을 확인한 뒤 다시 출발한다. 매번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쇠를 뽑았다 꽂았다 하는데 꽤나 번거로워 보인다. 운행 중에는 보는 이도 없는데 혼자서 각종 수신호를 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일행들과 “진짜 매뉴얼대로 한다. 장인정신이 느껴진다”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규칙을 지키면 바보 취급을 받는 사회에 사는 우리였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하고 빨리 하는 데 익숙한 우리였기에, 매뉴얼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결과가 좋으면 그만인 우리였기에, 우리는 그렇게 웃었다.

황망하게 배가 가라앉고 황당하게 지하철이 부딪히는 악몽 같은 현실을 보면서 나는 그날 웃었던 나를 책망했다. 원칙을 무시한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는지, 자신의 할 일을 팽개치고 달아난 짓이 무고한 이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사고를 수습해야 할 이들이 우왕좌왕하고 남의 탓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신뢰 없는 사회의 민낯을 보는 것도 암담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곤혹스럽다는 교사들을 적잖게 만났다. 자녀에게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라고 가르치지 못하겠다는 부모들도 많이 보았다.

지하철 사고 당시 안내방송이 없었다는 뉴스를 접한 지인들은 “안내방송이 나왔으면 더 아수라장이 됐을지도 몰라. 안내방송의 반대로 하느라 난리가 났을 거야”라고 입을 모았다. 10여 년 전 대구 지하철 사고를 취재했던 나 역시 이런 상황에 처하면 안내방송의 청개구리가 될 게 뻔하다.

세월호 참사에는 무원칙, 무책임, 안전 불감증, 무능한 행정, 관피아 등 수많은 문제가 녹아 있다. 무엇 하나 심각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깊이 잠자고 있던 문제들이다. 유일하게 원칙대로 작동한 것이라면 승객들이 선원과 정부를 믿었다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책을 얻지는 못한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를 만나야 사회적 의제가 되고 대책을 찾게 된다. 행정학자 존 킹던의 정의에 따르면 ‘정책의 창(Policy Window)’이 열리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문제들의 정책의 창이라고 하기에 세월호 참사의 비극은 너무나 크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큰 희생을 겪고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남은 자들의 무책임도 죄가 될 것이다.

노란 리본에 ‘잊지 말자’는 글귀를 꾹꾹 눌러쓰는 것은 희생자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문제들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기본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학원이 밀집한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정원 초과 벨이 빽빽 울리는데도 아이를 한 명이라도 더 밀어 넣는 행동을, 인적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신호에 멈춰 선 차에 경적을 울리며 위협하는 행동을, 급하다는 이유로 문이 닫히는 지하철에 다이빙하는 행동을 멈추자는 다짐이다.

한 달 뒤 투표장에 섰을 때 세월호 참사를 악용해 홍보 문자를 보냈던 사람들을 잊지 말고, 오키나와의 유이레일 기관사처럼 원칙과 소명에 충실할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