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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너무 무겁거나 혹은 너무 가볍거나

입력 | 2014-05-08 03:00:00


영화 ’역린’(왼쪽 사진)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국산영화 ‘역린’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이하 스파이더맨)는 최근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관객몰이 중인 작품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인 정조와 피터 파커는 비극적으로 아버지를 잃은 뒤 심리적 결핍에 시달리는 고독한 영혼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결정적인 아쉬움을 하나씩 남긴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공교롭다. 역린은 필요 이상 무겁고, 스파이더맨은 필요 이상 가볍다.

역린. TV 드라마로 성공한 연출자가 영화판으로 옮겨와서도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다모’와 ‘베토벤 바이러스’ 등을 연출한 이재규는 이 영화 데뷔작을 통해 드라마 PD로서의 한계보단 영화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는 ‘왕의 남자’와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1000만 관객을 넘은 사극영화 속 히트요소들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기득권 사대부에 억압당하는 ‘사회적 소수’로서의 왕을 등장시킴으로써 피해의식이 유독 많은 한국인의 공분을 자극한다는 점이 그러하고, 왕이나 왕을 지키려는 사람이나 왕을 죽이려는 사람이나 알고 보면 ‘관피아’(노론)의 영속적인 부귀영화를 위해 영혼을 잠식당하는 시대의 피해자들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이들 모두를 주인공으로 삼는 이른바 ‘멀티 톱’ 전략이 그러하다. 노론 기득권을 향해 “이것이 너희가 원하는 세상이냐” 하고 정조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대목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멀티 톱이란 말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멀티 톱은 말 그대로 주인공이 떼로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주인공을 두면서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을 각자의 이야기의 주체로 끌고 가는 전개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역린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 관한 절절한 사연을 기계처럼 덧붙임으로써 전개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주인공을 진짜로 ‘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영화가 첫 장면부터 웃통을 벗은 현빈이 식스팩을 과시하며 책을 읽는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톱스타 현빈을 실컷 소비하란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현빈의 존재감은 이후 수많은 캐릭터들의 등장 속에서 하릴없이 옅어지고 얇아진다.

영화는 2시간의 승부다. 드라마가 ‘더하기’의 예술이라면, 영화는 ‘빼기’의 예술이다. 드라마라는 ‘마라톤’에서 절대강자인 이재규가 영화라는 ‘100m 달리기’에서도 성공하려면 하고 싶은 말을 참아내는 절제력, 내가 던지고자 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에 영혼을 응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역린에 비하면 스파이더맨은 이야기와 캐릭터가 지나치게 얇아서 문제다. ‘거미인간’이라는 어찌 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에 내면적 고민으로 가득 찬 무게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 샘 레이미 감독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연출을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새롭게 기획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연출을 ‘500일의 썸머’의 마크 웹이 맡게 된 순간부터 이 영화가 10대 혹은 철들지 않은 20대를 위한, 풍선처럼 가벼운 하이틴 로맨스 영화로 전락할 것이란 사실을 예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일단 이런 간단한 영화의 상영시간이 무려 2시간 20분이란 사실부터가 참기 힘들다. 주인공 피터 파커는 더이상 사회적 소수가 아니다. 경솔하고 거들먹거리며 졸업식에서 대표연설을 하는 잘나가는 여자친구를 둔 신세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가 여자친구인 그웬과 나누는 대화라는 게 “너마저 잃은 순 없어. 미안해”(파커) “이런 식으론 못 만나. 그만 우리 끝내자”(그웬) 수준이다. 급기야 파커가 “우린 헤어졌으니까 더이상 내 앞에서 코 만지지 마. 너무 깜찍하잖아” 하고 유치원생 수준의 대사를 던질 때는 스파이더맨에겐 영혼뿐 아니라 뇌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무산자 계급의 한과 화를 파괴적인 능력으로 뿜어낼 것으로 기대되었던 악당 일렉트로도 그저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난 전기엔지니어에 불과하게 그려진다. 캐릭터들의 내면에 깃든 콤플렉스와 결핍, 열등감이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놀라운 능력으로 전환되어 폭발했던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상상력은 더이상 없다.

캐릭터들의 내면과 영혼을 휘발시켜버리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싸구려 초콜릿 맛의 대사들과 유머, 몇몇 감각적인 액션 장면들에 기대며 노골적으로 10대용 팬시상품으로 방향을 트는 요즘 할리우드 대작들의 변화가 나는 영 불만이다. 1편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 ‘트와일라잇’이나 ‘헝거게임’도 속편에선 어떤 사회적 은유나 메시지도 내팽개쳐 버린 채 ‘청소년들이여, 떼로 와서 보아라’ 하고 노골적으로 손짓하는 쪽으로 변절하고 말았다.

만날 똑같은 미국식 영웅담만 늘어놓는다는 비판에 시달리며 한계에 부닥친 할리우드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B급 공포영화 감독(샘 레이미)에게 ‘스파이더맨’을 맡기고, 좌파 다큐멘터리 감독(폴 그린그래스)에게 ‘본 얼티메이텀’을 맡기면서 비주류의 낯선 상상력을 통해 주류를 혁신해나가고 외연을 넓혀갔던 그 위험하고 위대한 도전정신은 사라진 걸까. 나는 스파이더맨이 정의를 위해 사용해야 할 그 귀한 거미줄을 여자친구를 위해 수없이 쏴대면서 ‘I LOVE YOU’라는 커다란 글씨를 다리 난간에 만드는 한심한 모습을 더이상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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