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선 산업부 기자
그런데 그런 할머니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아마도 90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점점 집안 기기 다루는 걸 어려워하셨다. 치매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퇴화하기 시작한 할머니의 ‘학습능력’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 발전’ 사이에 간극이 생겼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TV였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TV란 물건이 전혀 없던 시절에 태어나 흑백 TV, 컬러 TV를 거쳐 배불뚝이 TV, 액정표시장치(LCD) TV, 발광다이오드(LED) TV까지 끊임없이 변하는 기술과 제품에 적응하며 수십 년을 사셨다. 하지만 막판 적응은 쉽지 않았다. 새로 나오는 TV 디자인들이란 워낙에 ‘미끈하게 빠진’ 탓에 전원버튼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기 쉽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화덕에서 가스레인지, 그리고 인덕션으로, 또 기계식 전화기에서 다이얼식 전화기, 터치식 전화기로…. 그 빠른 변화 속에서 할머니는 아마도 꽤 불편했을 것이다. 가스 불을 켜달라고, 전화 좀 걸어달라고 자식, 손주에게 부탁할 때마다 서글펐을 것이다. 할머니를 배려한 제품과 기술이 있었다면 모두 할머니 스스로 하실 수 있었던 일이다.
어버이날이다. 그리고 100세 시대다. 우리의 어버이가 100세가 됐을 때 이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늙는다. 기술과 제품의 진화는 갈수록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할머니, 어버이 세대에 비해 우리의 미래는 더 곤란한 모습일지 모른다. 특히 강박에 가까울 만큼 신제품, 신기술을 선호하는 한국에서는 조금만 방심하면 노인 따윈 소외되기 십상이다.
노인들을 돌아보고 이들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건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이고 좀더 거창하게 말하면 고령화시대에 직면한 세계 인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질주하는 기술과 제품 혁신 속에서 잠시 숨을 멈추고, 불필요한 것을 빼고, 단순화해서 이를 저렴한 값에 공급하려는 기업들의 철학이 절실하다.
오늘도 매장엔 최신식을 자랑하는 기기가 넘쳐나지만 이들 중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선물할 만한 것은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어버이날 선물 고민을 해결해 줄, 노인의 삶을 생각하는 기업이 나온다면 난 기꺼이 지갑을 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