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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탑

입력 | 2014-05-09 03:00:00



―박영근 (1958∼2006)

저 탑이
왜 이리 간절할까

내리는 어스름에
산도 멀어지고
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지고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
무너져가는 몸으로
천지간에
아슬히 살아남아
저 탑이 왜 이리 나를 부를까

사방 어둠 속
홀로 서성이는데
이내 탑마저 지워지고
나만 남아
어둠으로 남아

문득 뜨거운 이마에
야윈 얼굴에 몇 점 빗방울
오래 묵은 마음을
쓸어오는
빗소리

형체도 없이 탑이 운다
금 간 돌 속에서
몇 송이 연꽃이 운다


하늘엔 먹구름 느리게 흘러가고, 그 아래 벌판을 화자는 정처 없이 걷고 있었을 테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날이 저물어 가는데, 한 돌탑이 화자의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는다. ‘수백 년 시간을 거슬러/무너져가는 몸으로/천지간에/아슬히 살아남은’ 형상의 돌탑. 어쩌면 절 터였을까. 알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 마을의 어떤 할머니는 들일하러 지나갈 때마다 그 앞에서 합장하고 고개 숙였을 테다. ‘저 탑이 왜 이리 나를 부를까.’ 들판에 버려진 듯 홀로 서 있는, 풍상에 닳고 닳은 돌탑에서 화자는 제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내리는 어스름에/산도 멀어지고/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서 산도 멀어지고, 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진 제 인생의 어스름을 보듯이.

화자는 천지간에 마음 둘 곳 없이 ‘사방 어둠 속/홀로 서성이는’ 나그네다. 화자의 외로움과 비애가 정갈한 시어에 실려 독자의 가슴이 자욱이 젖어드는데, ‘문득 뜨거운 이마에/야윈 얼굴에 몇 점 빗방울/오래 묵은 마음을/쓸어오는 빗소리’!

형체 없이 닳아도 탑에는, 그 금 간 돌 속에는 몇 송이 연꽃이 있을 테다. 돌탑의 희미한 연꽃 문양이 비에 젖어 선명해지듯이, 일생의 먼지가 쌓여 진흙탕 같은 화자의 ‘오래 묵은 마음’에 연꽃이 피어나려 움찔거린다. 박영근 시에는 남성적이면서 섬세한 서정이 깃들어 있다. 청정하고 우미(優美)한 연꽃처럼.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