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바다를 향해 엎드린채 기도하고 있는 실종자 가족. 동아일보DB
이순원 소설가
국내 최대 규모의 여객선이 왜 침몰했는지 원인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사고가 난 후에도 제대로만 대처했다면 모두 살릴 수 있었던 300여 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사망자와 실종자의 대다수가 이 오월에 막 피어나는 신록과도 같은 열여섯 살, 열일곱 살 아이들이란 점이다.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는 중이었고, 누구보다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어서 선내방송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보름 넘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올라오는 새 뉴스에 집중하다 보니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일을 보는 중에 가볍게 웃기라도 할라치면 저절로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른 손을 올려 입을 막게 된다. 한 친구는 일을 보러 안산에 갔다가 이 슬픈 도시에서 밥을 먹는 것이 죄스러워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한 후배는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전에는 성적에 대해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자신도 적잖이 신경 쓰며 압박을 주고 했는데 세월호 사고 다음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자기 옆에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20년 하는 동안 정말 큰일 아니면 집에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세월호 사고 후 전화도 자주 하게 되고, 퇴근 전 저녁마다 아이들의 안부를 챙긴다고 했다.
어느 택시기사는 딸만 둘을 둔 아버지라고 했다. 어릴 때는 딸이 가끔 재롱을 부리곤 했는데, 자라면서 그런 일이 거의 없다가 며칠 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일부러 대학생 딸 방에 가서 얼굴을 쓰다듬어 봤다. 처음엔 그런 표현을 어색해하던 딸이 이내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마음을 알아주어 함께 뭉클해지더라고 했다.
또 친구의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어디로 가든 집을 나설 때는 꼭 행선지를 알리고 들어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이게 했다. 밖에 나가서 한 일이 곧지 못하면 어른 얼굴 보기를 피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보다 엄격한 규율로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는 것 같다고 늘 불만이던 아이들이 요즘엔 출입인사를 하는 얼굴이 더 상냥하고 공손해졌다. 자신도 아이들의 인사만 받는 게 아니라 전과는 다르게 어깨를 치고 등을 두드리며 뭔가 격려의 말을 하게 되는데, 부자간에 이런 스킨십이 새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 역시 사고 이후 4월과 5월의 많은 행사를 취소했다. 그러나 몇 년째 주말마다 고향에서 하는 강릉바우길걷기 모임만은 빠짐없이 이어가고 있다. 어머니도 많이 참여하지만 아버지도 많이 참여한다. 요즘은 함께 걸으며 세월호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화도 내고 분도 삭이지만, 아버지들이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전보다 확실히 더 많이 한다.
이순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