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재난 대비] 대피안내 직원들, 승객 일일이 확인… 출항 전 15분 반드시 예행연습 벨울리자 승객 2000명 일사불란… “선원들만 탈출? 있을 수 없는 일”
“탈출 방법 말해 보세요”… 훈련 뒤 또 확인 4층 갑판에 마련된 C대피구역에서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비상시 탈출 요령을 설명한 뒤 한 승객을 골라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디즈니 매직호의 모든 승무원은 비상시 안전요원 역할을 맡는다. 포트커내버럴(플로리다)=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 세월호 침몰 참사처럼 촌각을 다투는 비상 상황에서 고귀한 생명을 보호하려면 선원과 승객 모두가 비상 매뉴얼을 몸으로 익혀 실제 상황에서 저절로 움직이도록 훈련해야 한다. 미국의 대형 여객선들은 출항 전 비상대피 훈련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5일 플로리다 주를 출발한 크루즈 여객선 디즈니매직호에 본보 특파원이 탑승해 직접 체험해봤다. 》
5일(현지 시간) 오후 4시 정각.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인근 커내버럴 항구에 정박해 있던 8만4000t급 크루즈 여객선 디즈니 매직호에서 요란한 비상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항을 앞두고 모든 승객과 승무원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비상대피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승무원들의 안내에 따라 어린이와 부모 등 2000여 명의 승객은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객실로 돌아가 지정된 대피장소를 확인했다. 객실 방문에는 개개인의 집합장소와 이동경로가 그려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플라스틱 카드 모양의 방 키에도 커다란 알파벳으로 자신이 가야 할 대피장소가 찍혀 있었다.
배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4층 오른쪽 갑판에 마련된 D구역. 노란 구명보트 아래에는 수십 명의 승객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역시 노란색 구명조끼를 입은 승무원들이 일일이 방 번호를 부르며 출석을 확인했다.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훈련 때와 마찬가지로 신원 확인 뒤 곧바로 구명보트를 타고 배를 탈출하게 된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훈련 분위기는 실제 상황을 방불케 했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자 구명조끼에 ‘집합 팀장(assembly leader)’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여성 승무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빨리 당신의 대피장소로 가라. 어딘지 모르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객실 카드에도 대피장소 커다랗게 객실 방문을 열 때나 계산을 하는 데 쓰는 카드 모양 키에도 각자의 대피 구역(점선)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이 배의 안전 책임자인 러시아 출신 예브게니 씨는 “배가 침몰하거나 화재가 나는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승객들이 어디로 대피해 구명보트를 타야 하는지 미리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이 훈련의 목적”이라며 “국제협약에 따라 출항 전 의무적으로 훈련을 실시해야 하고 승객들도 움직일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4박 5일 일정의 여행을 시작하는 첫 프로그램인 이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훈련 시작 30분 전부터 식당과 매점 등 배 위의 모든 편의시설이 문을 닫았다. 객실 안 유선 TV의 한 채널에서는 훈련 홍보 영상이 계속 흘러나왔다. 실제 상황을 가정해 비상 나팔이 울린 뒤에는 엘리베이터도 정지돼 모두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참사를 아는 승객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시카고에서 아홉 살 아들과 함께 여행을 온 미국인 캐니 씨 부부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교생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에게는 ‘객실에 있으라’고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범죄행위”라고 흥분했다.
4시 15분경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뒤 승객들은 모두 객실로 돌아갔다. 팽팽한 긴장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4시 반부터 9층 갑판에서는 승선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고 배는 고동소리를 울리며 안전한 항해를 시작했다.
포트커내버럴(플로리다)=신석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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