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논설위원
나는 보름쯤 전 공개된 오전 10시 17분의 또 다른 메시지를 기억한다. 그것도 단원고 학생이 보냈다.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는 다른 방송은 안 나와요”라는 내용이었다. 난 당시 한국일보 1면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간직하고 있다. ‘AM 10시 17분 마지막 카톡’이라는 글자 아래 배가 100도 가까이 기울어 이미 절반 넘게 잠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설명과 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화가 치밀어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다.
잔인한 4월이었다. 어른이란 게 부끄러운 4월이었다. 우리 속에 이준석 같은 무책임은 없는가, 우리 속에 유병언 같은 탐욕은 없는가, 우리 속에 해경 같은 무능함은 없는가 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나 자기 분야에서 조금씩은 이준석이고, 조금씩은 유병언이고, 조금씩은 해경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다. 그 차이가 합법과 불법을 가르고 도덕과 비도덕을 가른다.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자학(自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우리 모두 치료가 필요하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승무원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착륙 사고 당시 침착한 대응으로 인명 피해를 크게 줄여 칭찬을 받았다. 항공사는 정기적으로 실물크기 모형 비행기를 물 위에 띄워놓고 실제 비상 상황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한다. 1년에 안전교육비로 고작 54만 원을 지급한 청해진해운과는 다르다. 과거 사고에도 불구하고 해운회사처럼 뒤처진 곳이 있고 과거 사고에서 배워 항공사처럼 앞서 가는 곳도 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을 갖는 근거다.
연안 여객선을 한 번이라도 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뒤처진 교통수단인지를 느낄 것이다. 뭍에서 섬까지 한두 시간 가는 배만 있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고 치자. 수백 명의 승객과 수천 t의 화물을 싣고 1박 2일을 가는 배라면 더이상 우리가 아는 연안 여객선이 아니다. 카페리도 크루즈도 화물선도 아닌 것이 카페리와 크루즈와 화물선 역할을 다 하면서도 연안 여객선에 적용된 낡은 관행에 따라 취급된 것이 사고의 먼 원인이다. 큰 사고는 대개 새로운 것이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분노하라. 그러나 해결은 차가운 이성으로 추구해야 한다. 세월호가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물을 너무 넓게 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을뿐더러 잡아도 건져 올릴 수 없다.
지도자라면 어디가 앞서고 어디가 뒤처져 있는지 구별하고 뒤처진 곳에 그물을 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도 재야도 국가 개조를 얘기한다. 다 좋다. 그러나 디테일이 없다면 참사는 되풀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