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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왕이다/이유미]도서정가제가 동네서점 죽인다

입력 | 2014-05-14 03:00:00


한 대형서점에서 소비자가 책을 고르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유미 컨슈머워치 사무국장

지금 안도의 한숨을 쉬는 전집 출판업자들이 많을 것 같다. 당분간은 홈쇼핑에서 도서 할인 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간이든 구간(출간된 지 18개월이 넘은 책)이든 무조건 15% 이상 할인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법(도서정가제)이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참이었다. 그러던 것이 세월호 참사로 본회의를 열지 못하는 바람에 9월 정기 국회까지 미루어졌다.

이 법이 통과되었더라면 홈쇼핑에서 40∼70% 책 할인 행사 같은 것은 모두 접어야 한다. 세일이라도 해서 책을 처분하려던 출판업자, 책 판매업자들은 중고서점에 책을 넘기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폐지로 처분해야 할 판이었다. 소비자들도 편안히 앉아서 싼값에 전집류를 살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리라.

필자는 책 가격이 자유롭게 할인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격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책의 재고를 줄일 수 있고 그래야 새로운 책도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책 할인율을 묶는 도서정가제는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출판시장도 위축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웨덴, 핀란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책 판매 가격을 고정시키는 행위를 불공정행위로 보아 처벌한다. 실제로 미국의 애플은 전자책 판매 가격을 고정시킨 혐의(우리 식으로 하면 정가제)로 피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정가제를 주장하는 한국서점조합연합회는 “책은 자유시장 경쟁 논리가 작용하는 일반 소비재와는 엄격히 구분해야 할 지식재이자 공공재”라고 정가제의 명분을 제시한다. 즉 ‘특별한 가치’를 지닌 책이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할인 경쟁을 벌이다 보니 “가치가 떨어지고, 출판생태계가 파괴되며, 지역문화의 실핏줄인 동네 서점이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연합회 측에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책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소비자들이 판단하는 것이지 책을 만들고 파는 출판사나 서점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비자들은 특별한 가치가 있는 책이면 특별한 값이라도 치러 살 것이고, 무가치한 책이라면 아무리 할인을 해도 사지 않을 것이다.

동네 서점을 살리기 위해서 도서정가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도서정가제의 목적은 한마디로 책 판매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가격이 비싸지면 소비자는 책을 많이 살까, 아니면 덜 사게 될까? 당연히 덜 산다. 그런데 어떻게 동네 서점이 살아난단 말인가. 출판업계도 마찬가지다. 정가제가 엄격해질수록 판매는 줄어들고 생산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중소 서점의 퇴장은 도서 할인 경쟁이 아니더라도 이미 예견된 사실이었다. 출판되는 도서의 양이 많지 않았던 예전에는 몇 평짜리 서점에도 웬만한 책들을 진열할 수 있었다. 동네 서점에서 이러한 책들에 파묻혀 책을 고르는 낭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하루에도 수십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도서 분류도 대단히 다양해진 상황에서 동네 서점은 소비자의 발길을 잡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동네 서점은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 어필해야 한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가 아이와 함께 책 한 권 보러 갈 수 있는, 집 근처 문화공간이라는 장점을 살릴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 말이다. 아빠와 함께 책을 구입하면 할인 혜택을 주거나, 근처 어린이집 아이들을 초대해 책을 고르고 계산도 해보는 체험 공간을 제공한다면 어떨까?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동네 서점을 찾게 되지 않을까? 동네 마트들이 매일 달라지는 할인상품을 내놓듯, 인기 아동도서를 매일 한 권씩 골라 할인 판매하면 어떨까?

시대 변화에 맞는 생존전략을 수립하고 새로운 아이템으로 변화해야지 무작정 도서정가제를 고수한다고 동네 서점이 지켜지는 게 아니다.

출판계와 오프라인 서점계는 자신들의 어려움을 너무 쉽게 ‘할인을 좋아하는 소비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소비자를 위한 할인 경쟁을 차단하는 도서정가제 개정안은 불황이라는 출판계에 더 큰 불황을 가져올지 모르겠다. 소비자를 무시한 정책의 결과가 늘 그렇듯이 말이다.

이유미 컨슈머워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