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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에 뿌리내린 한류, 日우경화 바람막이 역할

입력 | 2014-05-15 03:00:00

[한-일 애증의 현장을 찾아/2부: 교류와 이해]
<中> 한류, 한-일 이어주는 가교




①4월 2일 일본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열린 한국 가수들의 팬 미팅 행사에서 일본 학생들이 흰 옷에 빨간 두건을 쓰고 크레용팝의 신곡 ‘어이’의 의상을 흉내 내고 있다. ② 4월 10일 홋카이도 왓카나이 시 종합근로자회관에서 ‘라쿠라쿠 한글 동호회’ 회원들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③ 홋카이도 왓카나이 시내 DVD 대여점 ‘GEO왓카나이’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모아 ‘한류’라는 별도 코너를 마련해 놓고 있다. 요코하마·왓카나이=박형준 특파원

일본 도쿄(東京) 신오쿠보(新大久保)에 있는 대표적인 한국 상품 매장인 한류백화점은 지금 경영 악화로 회생절차를 밟고 있다. 재일동포 기업가가 오사카(大阪)에 100억 엔(약 1000억 원)을 들여 조성하려던 ‘한류(韓流) 테마파크’도 최근 좌초 위기에 놓였다.

2003년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冬のソナタ)’가 NHK방송에서 방영되면서 한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 11년이 지났지만 지금 일본 내 한류 바람은 급속하게 잦아들고 있다.

그렇지만 한류 콘텐츠 전문배급사인 SPO의 마케팅본부장인 요코타 히로시(橫田博) 씨는 지금 국면에 대해 “한류가 붐의 단계를 지나 장르, 카테고리로 일본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평범한 일본인들을 만나 보면 한류가 과거처럼 폭발적으로 분출되지 않더라도 일본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고정 팬들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팬들은 일본 우경화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며 한일 관계의 미래를 밝혀주고 있다.

○ 최북단 어촌마을까지 퍼진 ‘한류’

“발음 조심하세요. ‘실스무니다’가 아닙니다. ‘실씀니다’입니다. 자, 따라해 보세요.”

지난달 10일 홋카이도(北海道) 왓카나이(稚內) 시내 종합근로자회관에서는 한국인 교사 박청근 씨(50·여)가 ‘싫습니다’의 발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20∼70대 학생 8명은 일제히 “실씀니다”라고 따라 했다. 제법 발음이 정확했다.

인구 3만7000명의 왓카나이 시는 일본 최북단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서 ‘라쿠라쿠(樂¤) 한글 동호회’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모여 한국어를 배운다. 왜 하필 한국어일까.

“돗토리(鳥取)를 여행했더니 대부분 간판이 한국어로 돼 있었어요. 일본과 한국은 옛날부터 깊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관계를 자세히 알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게 됐어요.”(사소 도시오·y敏雄·66)

“3년 전 한국 드라마 ‘꽃보다 남자’ DVD를 처음 빌려 봤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 뒤부터 계속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나카노 세이코·中野聖子·44·여)

한국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다양했지만 ‘한국에 관심이 커졌다’는 점은 같았다. 사토 교코(佐藤恭子·64·여) 씨는 지난해 여름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왔다. 그는 요즘 노트를 절반으로 접어 한국어와 일본어로 일기를 각각 쓰고 있다.

시골 마을의 한류 열풍은 DVD 렌털숍(대여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시내에서 가장 큰 가게인 ‘GEO왓카나이’의 천장에 매달린 대형 간판은 ‘일본’ ‘서양’ ‘한류’ 등 3종류뿐이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서양과 같은 비중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 일본 구석구석 스며든 한국 문화

가나자와 아야(金澤安미·26·여) 씨와 스에모토 아스카(末元明日香·23·여) 씨는 각각 도쿄와 오사카 출신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을 엮어준 것은 ‘K팝’이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우연찮게 트위터에서 서로 K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은 지난달 2일 가나가와(神奈川) 현 요코하마(橫濱) 시의 종합체육관인 아레나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일본 예선전에 참가했다. 스에모토 씨는 “도쿄에 올 때마다 가나자와 아야와 함께 신오쿠보의 한국 노래방에 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라이벌로 만났다”며 웃었다.

이날 아레나 입구에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2명이 크레용팝의 대표곡 ‘빠빠빠’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직렬 5기통을 흉내 낼 때는 주위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현장에서 만난 대학생 미야모토 사유리(宮本サユリ·22·여) 씨는 “나고야(名古屋)에서 신칸센을 타고 한국 가수를 보러 왔다. K팝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에 10번 이상 갔다”고 말했다.

요코타 본부장은 “한류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한국 문화가 일본의 일상생활에 녹아들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 음식점. 과거에는 야키니쿠(한국식 고기구이) 정도만 눈에 띄었지만 요즘은 한정식, 분식 등 다양한 종류의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어지간하면 한국 영화 한 편은 볼 수 있다. 외국 영화 수입배급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된 한국 영화는 46편. 미국 193편에 이어 2위로 거의 매년 2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3월 21∼30일 열린 ‘신오쿠보 드라마&영화제’에는 7000여 명의 관객이 몰렸다. 신오쿠보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이승민 실행위원장은 “전용 영화관이 없는데도 많은 일본인들이 찾아와 놀랐다. 신오쿠보가 한국 음식에서 나아가 한국 문화 발신지로 도약하려 한다”고 말했다.

○ 일본 우경화에 ‘브레이크’

일본에서 한류 영향을 취재하며 만난 일본인 30여 명은 한결같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우경화를 우려했다. 라쿠라쿠 회원 사토 씨는 “아베 총리의 행동을 보면 무섭다. 과거사를 다 부정하고 있다. 그러다간 한일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한국 여행 못 가는 게 아닌가 걱정 될 정도”라고 말했다.

한류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 일본인들은 한일 현안을 일본 극우세력처럼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보지 않았다. 신오쿠보 드라마&영화제에서 만난 60대 여성은 “아베 정권 인물들은 선거에서 표를 얻어야 하니 한국을 항상 때린다. 그런 아베 정권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꼭 알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부 한류 팬들은 “이젠 두 나라가 과거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고 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왓카나이·요코하마·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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