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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법재판소, 인터넷서 ‘잊혀질 권리’ 첫 인정

입력 | 2014-05-17 03:00:00

[글로벌 이슈]
클릭하면 개인정보 쫙∼ 구글, 밀려드는 삭제요청 골머리




국내 대학에 재학 중인 여대생 A 씨는 구글이 늘 불안하다. 구글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넣으면 과거 고등학교 시절 찍은 사진이 검색되기 때문이다. A 씨는 “그때 사진이 큰 콤플렉스라서 구글 측에 삭제 요청까지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만 들었다”고 말했다. 구글은 “원본 사진이 삭제되지 않는 이상 구글 검색에서 사진 링크가 나오지 않게 할 순 없다”는 입장이다. A 씨는 “사진 속 주인공이 난데,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는 게 너무 답답하다”고 말했다.

13일(현지 시간) 유럽사법재판소(ECJ)가 내린 일명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 판결은 구글이 이 같은 이용자들의 개인정보 침해 불만이 접수될 경우 당위성을 따져 필요시 해당 콘텐츠를 검색결과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명시한 판결이다. 이 판결은 유럽 내 28개국에서만 유효한 판결이지만 파장은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인터넷상 정보에 대한 개인의 삭제 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이기 때문이다.

개인정보 보호 옹호론자들은 “인터넷 기업들의 무차별적인 개인정보 수집과 이용자 동의 없는 활용이 갈수록 범람하는 상황에서 경종을 울린 판결”이라며 크게 환영한다. 반면 인터넷 자유 옹호론자들은 “개방과 표현의 자유는 인터넷의 기본 정신”이라면서 “이번 판결은 각종 부작용을 낳아 결과적으로 인터넷 사회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인터넷의 뇌관 ‘개인정보’


개인정보 이슈는 인터넷 업계에서 ‘뜨거운 감자’다. 미래 인터넷 발전의 최대 장애물은 기술이 아니라 ‘개인정보와 보안 이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실제 세계에서 가장 큰 인터넷 기업인 구글은 이번 ‘잊혀질 권리’ 논란 외에도 G메일을 통한 개인정보 수집 및 일명 ‘스트리트 뷰 스캔들’과 관련해 세계 각지에서 여러 건의 소송에 얽혔다.

스트리트 뷰 스캔들은 구글이 스트리트 뷰 지도 서비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법으로 세계 각국의 개인정보를 무단 수집해 논란이 된 사건이다. 지난달 이탈리아 정부는 이와 관련해 구글 측에 총 100만 유로(약 14억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한국 정부도 올 초 구글에 같은 건으로 2억123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한 바 있다.

페이스북 역시 개인정보 침해와 관련한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페이스북이 이용자 동의 없이 이용자의 온라인 활동 기록을 광고주들에게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용자와 페이스북 간에 소송전이 벌어졌다. 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페이스북은 이용자들에게 약속한 정보보호정책과 다르게 이용자들이 광고를 어떻게 클릭하고 어떻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하는지 파악해 이를 활용했다”며 “SNS가 자동적으로, 또 은밀하게 고객들의 정보를 노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외신들은 “구글과 페이스북이 새로운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출시하는 과정에서 이용자 보호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용자들이 갈수록 인터넷의 개인정보 이슈를 인식하고 있는 만큼 분쟁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발 정보 싹쓸이에 유럽 민감 반응

특히 미국보다 사생활 존중 문화가 강한 유럽에서는 글로벌 기업, 정확히는 미국 인터넷 기업의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반감이 더욱 거세다. 현재 유럽의 인터넷 검색 시장은 90% 이상을 미국 기업인 구글이 장악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e메일도 G메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도·감청 사건이 터지자 유럽인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인터넷상 개인정보 문제가 단순한 ‘기업과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 정보 주권 문제로까지 발전된 것이다.

유럽의 개인정보 보호 및 정보주권 문제를 가장 앞장서서 이끄는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에서는 지난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 대한 NSA의 도·감청 시도가 알려지면서 전 국가적 파문이 일었다. 이후 독일 최대의 통신기업인 도이치텔레콤을 비롯한 유럽의 정부·기업들은 ‘유러피안 클라우드’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의 인터넷 데이터가 유럽 대륙 밖에 있는 서버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유럽의 정보를 미국에 내주지 않겠다는 속내다.

독일 함부르크 주에서는 구글의 광범위한 이용자 데이터 수집 관행에 제동을 거는 규제안이 추진되고 있다. 해당 규제안 관계자들은 “구글은 (G메일, 유튜브, 구글 지도 등) 여러 서비스를 통해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데 이를 종합하면 한 개인의 깊고 내밀한 정보까지 알 수 있다”며 “구글이 독일인들의 데이터를 다루는 관행을 바꾸도록 지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외신들은 “구글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며 “유럽은 개인정보 보호 규정을 어긴 인터넷 기업에 최고 1억 유로 또는 해당 기업의 글로벌 연매출 5%를 벌금으로 부과하는 법안 마련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디지털 국경·디지털 보호무역 분쟁 점화


이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날 선 반응을 내놓고 있다. 이번 ‘잊혀질 권리’ 판결을 포함한 유럽 지역의 개인정보 보호 조치들이 사실은 사생활 보호를 앞세워 미국 인터넷 기업을 견제하려는 꼼수라는 것이다.

미국의 일부 인터넷 전문가는 “유럽이 개인정보 보호를 명목으로 ‘디지털 보호무역’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인터넷은 글로벌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하는 동력”이라며 “이번 판결로 미국과 유럽의 경제 동맹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터넷 자유론자들은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번 판결에 반발한다. 개인의 요청에 따라 검색 결과를 삭제하도록 한 결정은 인터넷의 열린 생태계를 종식시키려는 발상으로 결국 인간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치인이나 범죄자, 기업들이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삭제를 요청한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것이냐”며 “이번 판결은 힘 있는 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대표적인 오픈 인터넷 지지자이자 개방과 공유를 통한 집단지성 구축을 지향하는 ‘위키피디아’의 창립자 지미 웨일스는 이번 판결 이후 연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웨일스는 “이번 판결은 비단 구글만의 이슈가 아니라 저널리즘과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신문은 계속 출판되는데 그 결과를 구글에서 볼 수 없도록 검열한다면 그건 곧 신문에 대한 검열이다” 등의 의견을 트윗했다.

‘잊혀질 권리’ 실행까진 난관 산적

논란은 여전하지만 구글은 어떤 식으로든 유럽지역에서 ECJ의 결정을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CJ는 유럽연합(EU)의 최고 법원이라 항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이 결정을 적용하기까지는 숱한 난관이 예상된다. 당장 유럽 이용자들의 삭제 요청을 어떤 조직을 통해 어떻게 접수하고 처리할지부터가 문제다. 삭제 요청을 접수한 뒤엔 해당 콘텐츠를 해당 국가의 구글 사이트에서만 삭제할지, 전 세계 구글 검색결과에서 없앨지 등 미시적인 논쟁거리도 남아있다. 외신들은 “이 같은 논쟁 과정에서 인터넷 세상의 ‘디지털 국경(digital border)’ 이슈가 뜨거워질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삭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이냐도 문제다. 유럽지역의 구글 이용자들은 대략 5억 명에 이르는 만큼 이들이 한 사람당 한 개씩만 삭제 요청을 해도 천문학적인 시간과 공력이 필요할 수 있다. 이미 지난 한 주 동안 구글에 접수된 저작권 침해 관련 링크 삭제 요청은 530만 페이지나 된다. 만약 유럽 외 다른 지역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소송이 제기될 경우 그 비용은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기술적 한계다. 현재 구글 같은 전 세계의 검색엔진은 ‘크롤링(crawling·긁어오기)’이라는 수집 기술을 사용해 짧게는 4시간에서 길게는 24시간 주기로 전 세계 인터넷상 정보들을 자동으로 긁어간다. 쉽게 말해 한번 인터넷에 올라간 정보는 각종 검색엔진을 통해 하루 만에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경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퍼져나간 정보를 완벽하게, 모든 인터넷에서 지울 수 있는 기술은 현재로선 없다”며 “이용자가 문제 제기한 링크를 말끔히 지울 수 있는 기술적 대안이 마땅치 않고 이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도 워낙 크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국내 대안은 ‘블라인드’ 제도-역차별 논란도


구글 이용자들에게 ‘잊혀질 권리’가 있음을 판결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유럽사법재판소.

현재 국내에서는 인터넷에 올라간 개인정보에 대해 당사자의 문제 제기가 있을 경우 해당 콘텐츠를 일단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일명 ‘블라인드 제도’가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이의 네이버 블로그에 나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콘텐츠가 들어있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담겨있을 경우, 또는 초상권이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무언가가 있을 경우 해당 게시물의 게재를 임시로 중단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게 블라인드 제도다. 해당 콘텐츠가 실제로 문제가 있는지는 방송통신위원회 등 적법한 자격을 갖춘 기관이 판단하지만 그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임시 조치로 검색결과에서 ‘보이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외국계 서비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구글코리아 관계자는 “네이버나 다음은 포털 서비스고 구글은 검색엔진 사이트란 점에서 출발부터가 다르다”며 “구글은 해당 규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구태언 테크앤로 대표 변호사는 “포털이냐 검색엔진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구글이 미국 기업인 게 이슈인 것”이라며 “정보통신망법은 서비스 형태를 구분하지 않고 임시 조치를 명시하고 있지만 미국 기업인 구글이 국내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인터넷 업계의 한 관계자는 “외국계 서비스의 경우 국내 기업만큼의 이용자 보호 부담을 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며 “블라인드 제도 또한 전형적인 국내 인터넷 기업에 대한 역차별 규제”라고 꼬집었다.

망각이 사라진 시대-‘세 살부터 교육’ 필요


지역과 기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터넷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하나의 진실은 인터넷이란 곳에 한번 올라간 ‘나’는 완벽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완벽히’가 아니라 ‘거의 완벽히’ 지우는 데만도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인터넷이 없던 과거 세상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게’ 가능했지만 인터넷 검색의 시대에선 그렇지 않다. 검색만 하면 수십 년 전의 ‘나’도 오늘의 눈앞에 나오는, 망각이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터넷 이용자 개개인의 신중한 태도다. 자신의 정보, 사진, 의견을 인터넷에 올리는 순간, 해당 정보가 언제 어디서든 남에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 아무 생각 없이 올린 글 한 줄, 사진 한 장이 수십 년 뒤 한 개인의 인생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 교수는 “부모와 학교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인터넷을 사용할 때 신중을 기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교통사고의 위험성에 대해 알려주는 것만큼이나 SNS 사용에 대해 진지하고 반복적인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