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의인/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 아버지 돌아가신 뒤 대학 휴학하고 가장 역할 ▼
학생들 먼저 탈출시킨 女승무원 박지영씨
최성덕 할머니(75)는 지난달 16일 손녀의 사망 소식에 “오늘이 지 아비도 그렇게 된 날”이라며 통곡했다. 3년 전인 2011년 4월 16일, 박지영 승무원의 아버지 박유식 씨(당시 45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반년 뒤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자 박 승무원이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가장이 됐다. 대학 1학년 때였다. 이듬해 학교를 휴학하고 PC방과 옷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에게 사촌오빠 박현준 씨(30)가 여객선 승무원 일을 권했다. 박 씨는 “고민하던 지영이가 월급 200만 원에 숙소, 유니폼, 밥이 공짜로 나와 돈 쓸 일도 없다고 하니까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박 승무원은 스무 살이던 2012년 봄 세월호의 쌍둥이선 오하마나호를 타기 시작했다. 얼마 뒤 세월호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 선원이 드문 배 안에서 그는 ‘남자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오하마나호 고홍근 사무장은 “한 승객이 뱃멀미를 했는데 지영이가 밤을 꼬박 새우며 아침까지 옆에서 얼음찜질하고 혈압 재면서 간호했다”고 말했다.
남편 잃은 지 3년도 안 돼 큰딸을 빼앗긴 박 승무원 어머니의 카카오스토리에는 바다에 배가 떠 있는 사진을 배경으로 ‘늘 안녕과 행운이 가득하길’이란 문구가 있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여학생들 다칠까봐 날아오는 공 얼굴로 막아 ▼
학생들 구하러 식당 달려간 승무원 안현영씨
안현영 씨는 열두 살 때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가족들은 발을 굴렀다. 3시간이 지나 나타났다. 옷이 땀에 절어 있었다. 어머니 황정애 씨(55)가 “집에도 못 가고 걱정했잖아” 하고 호통을 치자 그가 말했다. “어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기에 집까지 들어다 드렸어요. 저희가 집에 가는 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는 중고교 동창들과 만든 친목 모임 ‘MUR(망우리)’에서 인맥의 중심이었다. 친구 김재홍 씨(28)는 “현영이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똑같지”라고 답한 뒤 상대방 얘기를 물었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듣고 반응해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그런 그가 냉정해질 때가 있었다. 안 씨는 대학 시절 호프집, 액세서리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들이 찾아가 ‘서비스 안주 좀 달라’ ‘액세서리 하나만 달라’고 하면 안 씨는 “안 된다. 내가 돈 줄 테니 그걸로 사라”고 잘랐다. 김 씨는 “호프집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잠깐만 쓰자고 했더니 ‘외부인은 못 들어가는 게 원칙’이라고 해 섭섭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사고 사흘 전, 그는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부탁을 했다. 스무 살 이후 내내 돈을 벌어 쓴 안 씨는 부모에게 작은 부탁도 거의 하지 않았다. “배드민턴 라켓 살 수 있는 곳 좀 알아봐 주세요. 수학여행 가는 애들이 14시간 배타고 가다 보면 심심해하거든요. 배에 몇 세트 있으면 애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탈출기회 마다하고 남은 女승무원 정현선씨
3년 전 불꽃놀이가 한창이던 오하마나호 갑판. 한 승객이 불꽃놀이를 구경한다며 무대 앞 바리케이드 위에 앉아 있다가 뒤로 자빠졌다. 깜짝 놀란 정현선 씨는 기절한 승객에게 응급처치를 한다며 뛰어가다 넘어졌다. 이 일로 발목 인대가 끊어져 3개월간 깁스를 했다. 승객은 기절한 게 아니라 만취해 누워있었다. 정 씨는 다음 날 절뚝거리며 나타나서는 ‘헤헤헤’ 웃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뭔 일만 생기면 일단 뛰고 보는 사람”으로 통했다.
정 씨는 대학을 휴학하고 스무 살에 배를 탔다. 오하마나호 카페 직원이던 어머니가 병으로 일을 그만두자 대를 이어 배에 올랐다. 아버지는 정 씨가 초등학생일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언니 윤선 씨(35)는 “집 사정을 생각해 일을 일찍 시작했다. 당시 인천∼제주를 오가는 배가 하나뿐이었는데 그 배를 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했다.
배에서는 ‘정 장군’으로 불렸다. 옷 뒷주머니에 몽키 스패너나 드라이버를 꽂고 다녔다. 수리할 곳이 보이면 바로 공구를 꺼냈다. 담요는 15장씩 한 번에 날랐다. 동갑 연인인 아르바이트생 김기웅 씨가 술 상자를 옮기고 있으면 “한 번에 두세 상자씩 옮기라”고 말하며 아웅다웅했다.
동료들은 정 씨에게 ‘해군 부사관을 하면 잘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부사관 시험을 두 차례 쳤다 떨어졌다. 정 씨는 “배 타는 게 천직인가 봐요”라며 웃곤 했다.
지인들은 정 씨가 원피스와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천생 여자지만 배에 오르면 대장부가 된다고 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침몰 당시 한 발짝만 옮기면 탈출할 수 있는 3층 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연신 학생들을 내보냈다. 정 씨를 마지막으로 본 화물기사는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하던 도중 정 씨와 눈이 마주쳤다.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눈빛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손효주 hjson@donga.com·임현석 기자
▼ 친구들 집에 불러 직접 요리해주는 것 좋아해 ▼
애인과 끝까지 남은 아르바이트생 김기웅씨
학창 시절부터 김기웅 씨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손수 만든 요리를 먹이는 걸 좋아했다. 김 씨의 고등학교 동창인 한승호 씨(27)는 “기웅이에게 처음 들은 말이 ‘우리 집에 삼겹살 있으니까 놀러와’였다”고 했다.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김 씨는 집에 혼자 있는 일이 많아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불렀다. 시간이 늦어지면 자신의 방에서 자고 가라고 한 뒤 자신은 늘 거실에서 잤다. 김 씨 방은 두 명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김 씨 상사였던 선상 불꽃놀이 이벤트 업체 김상석 대표(41)는 “기웅이가 포장마차 일을 하던 어머니를 줄곧 도와서 그런지 곱창볶음 같은 요리를 잘했다”고 했다. 김 씨는 배에서도 한번 요리를 하면 10인분 넘게 해서 나눠 먹었다. 집에 있는 묵은지, 곱창 같은 재료들을 늘 챙겨왔다. 김 씨는 불꽃놀이 담당이었지만 주방 일을 거들어 주방 아주머니와도 친했다.
김 씨는 ‘빌게이츠’로도 불렸다. 기계 지식에 해박해 컴퓨터를 잘 고쳤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컴퓨터 살 때는 김 씨를 먼저 찾았다. 컴퓨터 용도와 예산을 말해주면 김 씨는 최저가로 부품을 구해와 컴퓨터를 뚝딱 조립해냈다.
친구들은 올해 초 친목 모임에 김 씨를 불렀다. 모임 회비는 10만 원이었다. 김 씨는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회비가 부담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생활비를 벌려면 배를 타야 돼서 참석을 못 하겠다”며 사과했다. 친구들은 “돈 안 받을 테니 걱정 말라”며 가까스로 김 씨를 설득해 인천 을왕리에 갔다. 이날 저녁 김 씨는 동갑내기 연인 정현선 씨와 통화하며 “일을 거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돌아와서는 친구들에게 “올해는 꼭 취업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인천대 도시건설공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 씨는 올해 연인인 정 씨와 결혼할 예정이었다.
임현석 기자 ihs@donga.com
▼ 취객 달래고 변기 수리… 세월호 해결사 ▼
학생 구하러 간 양대홍 사무장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 씨의 어릴 적 꿈은 개그맨이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익살을 부려 남을 웃게 하고 싶었다. 그 꿈을 배에서 이뤘다.
“얼굴 둥그스름하고 재밌고 여기저기 나타나던 그 직원요?” 배를 탔던 승객들이 양 씨의 실종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양 씨는 웃음을 머금고 잰걸음으로 배 안을 돌아다녔다. 그가 농담을 던지면 승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비스 책임자로 고위 승무원이었지만 변기 수리, 전기배선 공사, 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밤 12시에야 업무가 끝나지만 로비에서 잠든 승객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술 취한 승객 말상대를 하느라 오전 3시까지 일했다. 오하마나호 라이브 가수로 일했던 형 석환 씨(48)는 “인천에서 제주까지 가는 14시간 동안 동생은 승객들과 정이 깊게 들곤 했다”고 했다.
2011년 한 여성 승객이 남편과 다툰 뒤 바다에 뛰어들겠다며 소동을 벌였다. 이런 일이 매년 4, 5차례 있었다. 양 씨는 자살 소동이 있는 날은 잠을 안 잤다. 고홍근 오하마나호 사무장은 “자기가 잠들면 승객이 또 나쁜 생각을 할까 봐 승객과 이야기하면서 밤을 새운다고 하더라”고 했다. 고 사무장은 “승객들 얘기를 밤새 들어줘 배 탄 지 4년 됐지만 대홍이를 못 잊는 승객이 많았다”고 했다.
3남 2녀 중 막내지만 줄곧 부모를 모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밀고 나타나 “내 머리카락을 무덤에 넣어 달라”며 울었다. 이후 청각장애가 있는 홀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각각 고교생, 중학생인 두 아들이 있다. 아들들과 2 대 1로 씨름하는 걸 좋아했고 “형이라고 불러”라고 할 정도로 친했다. 형에게 늘 “학생들 너무 예뻐요”라고 말하던 그는 학생들을 구하다 끝내 나오지 못했다. 박지영 안현영 정현선 씨 모두 그와 함께 일하던 사무부 승무원이었다.
손효주 hjson@donga.com / 진도=여인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