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이 오대양 집단자살 원인 제공했을 것으로 본다”
심재륜 변호사는 23년 전 오대양사건 재수사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유병언 전 회장이 경호원 10여 명이 늘어선 가운데 대전지검으로 출두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는 “유 씨의 신병 확보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며 검찰 수사를 걱정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심재륜 변호사(70)가 “우리 집안은 전쟁을 치러봤다”는 유병언 전 세모 회장의 장남을 거론하며 한 말이다. 세월호 선사(船社) 소유주인 유 씨와 자녀, 최측근들이 검찰 소환에 불응하고 잠적했다. 유 씨 역시 16일 출석 통보를 받고도 소환에 불응했다. 세월호 참사의 ‘몸통’에 해당하는 유 씨 일가에 대한 수사는 난관에 부닥친 상태다.
심 변호사는 23년 전 대전지검 차장검사로 오대양 사건 재수사를 지휘했다. 지금은 없어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부장 재직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를 구속해 ‘국민의 중수부장’으로 통했던 인물이다.
“23년 전에도 유병언의 행방은 묘연했고 연락도 안 됐다. 구원파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 가정집을 순회하는 예배를 했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기가 힘들었다.”
인천상륙작전 하듯 허를 찔렀다
―어떻게 찾아내 소환할 수 있었나.
“수사에는 지략이 필요한 법이다. 정공법으로 안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꾀를 냈다. ‘(5공) 정권 핵심과의 유착설이 나돈다. 억울한 게 있으면 직접 해명을 해라.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를 여러 채널로 흘려놓고 전화가 오길 기다렸다. 전화가 오면 특수부장이 직접 통화를 하게 했다. 그를 보호해준다는 명목하에 수사관도 한 명 붙였다. 신병을 그렇게 확보하지 않았으면 수사가 힘들 뻔했다.”
―검찰이 그의 신병 확보에 고심하고 있다.
“그래서 체포영장을 건너뛰고 바로 사전구속영장을 친 것 같다. 구인장이 발부돼도 실질심사를 받으러 법정에 나오지는 않을 거다. 산 넘어 산이다. 구원파 신도들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금수원에 강제진입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다. 농성하는 사람 수의 최소한 3배 넘는 병력이 동원돼야 체포작전을 펼 수 있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데 심하게 저항할 수 있겠나.
“‘갈 데까지 가보자’는 사람들이다. 유혈사태가 발생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나오면 어쩔 건가.”
“수사에 착수하기 전 자살과 종교집단이라고 하는 점을 오랫동안 골똘히 생각해봤다. 사이비종교에 대한 사전 공부를 했다. 오대양 집단자살은 ‘항의성 자살’이라고 볼 수 있다. 광신도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신에 대해 직접 항의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을 대행한다는 유병언을 필두로 한 구원파 핵심에 대한 항의라고 봤다. 결국 오대양 사건은 오대양과 박순자 사장을 넘어 구원파와 유병언에 대한 관계를 파헤쳐야 전말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배후 수사는 결국 미궁에 빠졌다.
“유병언이 오대양 집단자살의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집단자살에 연루된 혐의에 대해선 내사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가 모두 숨진 상태고 뒤늦게 자수한 6명은 평범한 하급 신도들로 구속 수감돼 있는 바람에 죽음을 면했다. 출소 후 오대양으로 가보니 모두 죽고 사라져 구원파 윗선에게 찾아갔다가 자수 권유를 받은 것으로 보였다.”
―당시 유 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인가.
“유병언에 대한 수사는 피해자들이 모두 숨져 증거가 없어 상습사기에서 더이상 못 나간 것이지 무혐의 처분을 한 것은 아니다. 이 6명은 배후의 핵심인물에 대해선 한마디도 진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대양-구원파-유병언으로 이어지는 돈의 흐름을 찾아내기로 한 것이다.”
―상습사기는 어떻게 인정된 것인가.
“재산을 갖다 바친 신도의 다른 가족들이 문제를 삼은 사기사건 5, 6건이 무혐의처리됐다. 종교상 자발적인 헌금이라는 논리로 사건을 무마한 것이다. 우리는 전형적인 상습사기로 봤다. 일부에선 별건(別件)수사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32명의 집단자살에 대한 책임을 간접적으로라도 물어야 했다. 당시로선 성공한 수사였다.”
―유 씨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구원파 설립자인 권신찬 목사의 사위다. 신학교를 나와 목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권 목사는 그를 메시아로 내세워 신도들이 떠받들게 했다. 이 세상은 곧 종말을 맞게 될 테니 하나님 사업하는 그에게 헌금하는 것이 천국 가는 길이라고 신도들을 현혹한 것이다.”
천사같은 미소 띠고 조사받아
―조사는 어떻게 받았나.
“(웃으면서) 천사와 같은 미소를 띠고 조사를 받았지. 신도들은 그가 카리스마가 엄청난 사람이라고 했다. 옆에만 가도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고 병이 나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의 정체는 상습사기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교주처럼 섬기는 것을 보면 고도의 최면술사라고 해야 할까.”
―근황을 아는 게 있나.
“지금은 사진작가 발명가 같은 사람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 같다. 작년 초 코엑스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다. 그때 전직 고위관료와 주한 외교사절 등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도 참석했다고 들었다.”
―신도들에게 돈은 어떻게 받았나.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집문서를 가져오게 했다. 재산서류를 넘겨받아 담보대출을 받는 수법을 동원했다. 전국 단위로 모집책을 뒀다. 오대양 사건의 주모자인 박순자 씨는 대전 모집책이었다. 당시 구원파 신도는 2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한 명당 1000만 원 씩만 받아도 얼마인가”
―유 씨는 자신의 혐의를 시인했나.
“언론이 소설을 썼다고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부터는 목사 활동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순자에 대해서도 교회를 이탈해 오대양교를 만든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걸 보며 그가 도덕적 신앙적으로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지검이 그의 신병을 확보하더라도 그때보다 훨씬 더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할 거다.”
―5공 정권 실세와의 친분설은 사실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와 고교 시절부터 태권도를 같이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이 세모를 방문한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모의 고속성장과 5공 정권과의 유착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부분까지 수사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당시 수사 과정에서 외압(外壓) 같은 것은 없었다. 세모 측이 미국에 있던 나의 동창생을 귀국시켜 로비를 하긴 했다.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갈 사람도 아니고….”
―그때 구원파와 유병언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했더라면 세월호 참사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법률을 아는 사람 중에도 살인죄로 기소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던데…. 종말론에 의거해 자발적 자살을 한 것을 어떻게 살인죄로 기소할 수 있겠나. 재수사에 들어가기 4년 전 사건이었고 피해자는 숨진 상황이었다. 그때 장관이나 검찰총장은 사건의 파장이 그렇게 클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수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나와 특수부장 모두 인사발령을 냈다. 사건의 마무리는 잘됐지만 여죄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 시기 특검 거론은 부적절
―유 씨에게 세월호 침몰의 책임까지 물을 수 있나.
“그를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하더라도 법원에서 유죄가 나올지 의문이다. 지금은 304명의 희생자 실종자로 분노의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 법정에서 판단이 어떻게 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많은 인명피해를 낸 부산 대아호텔 화재사건 당시 사장을 업무상 과실치사로 구속기소했지만 결국 무죄가 나더라. 세월호 침몰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지게 만들려면 법 논리를 탄탄하게 세워 입증을 잘해야 할 것이다.”
―구원파 측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2년 전에 월간지에 기고했다가 2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했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인데 1심에 승소해 지금은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다. 그를 잡아넣은 원흉이 나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 같다. 이제 그와의 악연을 끝내고 싶다.”
그는 “외압이 있다든가 해서 특검을 할 필요가 있는 사건이 있지만 이번 사건은 그렇지도 않고 유병언 일가의 신병 확보에 검찰이 힘을 쏟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벌써부터 특별검사제 도입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심 변호사는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다”며 검찰 수사를 걱정했다.
▼유 前회장 직접 연루 증거 못찾아… 상습사기로 4년刑▼
■오대양사건 재수사
1987년 8월 29일 경기 용인시의 오대양 공예품 공장 내 식당 천장에서 박순자 사장과 종업원 등 32명이 집단 자살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거액의 사채에 쫓기던 구원파 신도(당시는 교주로 알려졌다) 박 사장과 추종자들의 집단 광기가 우리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졌던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혹은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이다.
1991년의 재수사는 다른 사건으로 복역을 마친 오대양 직원 6명이 구원파 신도 3명을 구타 살해 암매장했다고 충남도경에 자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집단자살 당시 구원파 윗선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처에서 신도들에게 전한 메모 하나가 현장에서 발견됐다.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 그쪽에서 알아서 하라.’ 검찰은 “헌금과 대출 때문에 막대한 빚에 쫓기던 신도들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위에 물어 보았을 것이고, 쪽지의 내용은 그 답이었을 것”으로 봤다. 그래서 오대양의 박 사장 등이 최후의 선택을 했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오대양 집단자살에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직접적으로 연루된 증거는 없었다. 검찰은 헌금 등 11억 원을 챙긴 혐의(상습사기)로 유 씨를 구속기소했다. 1심에서 징역 8년,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됐다.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당시 대전지검 검사장은 검찰동우지에 ‘오대양 진혼곡’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오대양사건이 하필이면 대전지검으로 오게 된 것은,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죽어갔을 30여 명의 원혼들이 한을 풀어달라고 내게 외친 것이 아닐까”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했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보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