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사회부 기자
이쯤에서 생각나는 또 다른 전쟁이 있다. 노태우 정부 중반 무렵에 선포된 ‘범죄와의 전쟁’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임기 3년차인 1990년 10월 폭력조직에 대한 일제 소탕을 지시했다. “헌법이 갖고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하겠다”며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하고 과소비 투기 퇴폐 향락까지 고치겠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국가 개조 수준의 내용이었다.
물론 두 전쟁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무렵은 군사정권에 대한 불신,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등으로 대통령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을 때였다. 이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 판단이 고려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때도 세월호 참사 때처럼 뿌리 깊은 민관 유착 의혹이 불거졌다. 1991년 3월 국회 내무위원회는 슬롯머신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불법이 적발돼 허가가 취소된 경우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재개할 수 있는 제한기간을 3년에서 2년으로 줄인 것이다. 승률 조작 등을 확인하기 위해 슬롯머신 기계를 수거하는 조항도 삭제했다. 폭력조직의 개입 의혹을 가장 많이 받던 슬롯머신업계를 오히려 도와준 것이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지 불과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전투가 한창인데 이적(利敵)행위를 한 셈이다.
이처럼 ‘적폐’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어지간한 공격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공격의 칼날이 무뎌질 때까지 잠시 동안 몸을 숨길 뿐이다. 그동안 여러 정부가 수많은 불법·비리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가 적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앞서 치러진 범죄와의 전쟁 등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적폐의 위력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4대악 척결’ ‘안전한 대한민국’ 같은 공약도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적폐와의 전쟁에서 또다시 무릎 꿇지 않으려면 대통령의 말대로 ‘명운(命運)’을 걸어야 한다.
이성호 사회부 기자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