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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걸 씨 “눈이 점점 멀어질수록… 커피향은 점점 진해졌어요”

입력 | 2014-05-21 03:00:00

‘망막색소변성증’ 앓는 시각장애인 노환걸 아로마빌 대표




5월 중순 경기 화성시 팔탄면의 아로마빌 커피공장에서 노환걸 대표(오른쪽)가 직원과 함께 커피 향을 맡아보고 있다. 이마트 제공

“마케팅팀장 시절이었어요. 포장지 시안을 보고 의견을 말했죠. 순간 정적이 흐르더라고요. 엉뚱한 말을 한 거였죠. 얼마 후에는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어요. 지방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2시간 동안 기다린 적도 있어요. 버스가 오는 게 안 보이니 세우지를 못한 거죠. 언젠가부터는 밥도 혼자 먹을 수 없었어요. 성격도 점점 이상해졌고요. 정말 힘든 게 뭔지 아세요? 눈이 서서히 나빠지니까 절망도 서서히 와요. 하루하루 절망이 쌓여가는 겁니다.”

○ 하루 50잔의 커피와 ‘구역질 나는’ 희망 찾기

중소 커피제조회사인 아로마빌의 노환걸 대표(51)는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병을 앓고 있다. 개그맨 이동우 씨로부터 시력을 앗아간 바로 그 병이다. 눈을 이식해도 안 된다. 누구나 결국엔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지금 그는 식탁 너머에 앉은 사람의 형체만 간신히 볼 수 있다.

노 대표는 스물여섯 살 되던 해 커피를 만드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주로 마케팅 쪽에서 일했다. 눈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한창 일할 때인 2003년이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5년이 지나서야 병의 이름을 알게 됐다.

시력은 급격히 나빠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2010년 9월 결국 회사를 나왔다.

그는 한 달 후부터 아내가 운영하던 작은 커피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바로 지금의 회사다. 놓아버리려던 삶을 다시 세우려 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사라져가는 시각을 만회해 주는 것은 후각과 미각. 노 대표는 하루 40∼50잔씩 커피를 마시며 신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그렇게 커피를 먹으면 정말 구역질이 나요. 도저지 삼킬 수 없을 땐 뱉어내야 했지요.”

작은 회사였지만 품질만큼은 자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컵커피도 개발했다. 지금까지 10여 건의 커피 관련 지식재산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알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 절실함, 대형마트를 움직이다

‘구역질 나는’ 노력은 2011년 10월 결국 행운을 불렀다. 당시 이마트에서 가공식품을 담당하는 최성재 상무(현 부사장·식품본부장)는 한 식당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다 무릎을 쳤다. 뜻밖에 맛이 있었다. 그는 종업원에게 커피 봉지를 얻어 수소문에 나섰다.

“이마트 커피 바이어인데요….”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노 대표는 사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포함해 일하는 사람이 11명뿐인 작은 회사에 대형마트가 먼저 연락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결국 몇 개월에 걸친 검증 끝에 그가 만든 커피는 이마트에 당당히 입성했다.

지난해 6월 노 대표는 자신의 커피를 이마트의 자체브랜드(PB) 상품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중소기업이 대형마트에 어떤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당함은 이마트를 움직였다. 최 부사장은 “절실함이 느껴졌고, 그들에게 계속 일거리를 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로마빌은 올해 1월부터 이마트의 자판기용 PB 커피를 만들고 있다. 자판기용 커피 외에도 다양한 커피 제품 납품을 논의 중이다.

“10년 이내에 장애인 1000명을 고용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싶어요.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제품을 사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동정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을 겁니다.”

노 대표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지만 희망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화성=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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