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전문기자
2001년 7월 전용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식량 문제에 대해 이 같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김 위원장은 “(쌀과 같은) 곡물을 운송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독일 사람들도 감자에 적응하다 결국 주식으로 삼았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도 했다. 북한 주민들이 식량난을 덜 수 있는 대안을 외면한 채 쌀에 집착하는 실태가 답답하다는 게 김 위원장의 의중이었다.
당시 그의 맞은편에는 러시아연방의 극동지구 대통령 전권대표(부총리급)인 콘스탄틴 풀리콥스키가 앉아 있었다. 풀리콥스키는 김 위원장이 전용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질러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다시 북한과 러시아 국경으로 귀환하기까지 24일간 수행했다. 그는 김 위원장과의 대화 내용을 포함한 당시 경험을 ‘동방특급열차’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김 위원장에 대해 다방면에 걸쳐 박식하고 소탈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주요 관심사를 보고 받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을 직접 확인하는 꼼꼼한 성격의 지도자라고도 평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북한의 김정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만성적 식량난으로 ‘영실(영양실조) 동무’ ‘강영실(강한 영양실조) 동무’가 속출하고, 평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 지역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더욱이 올해에는 수십 년 만의 ‘왕가물(아주 심한 가뭄)’ 때문에 농사에 큰 피해가 우려된다고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일각에선 올해 말이나 내년쯤 북한의 식량난이 극에 달해 집단아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식량난을 방치할 경우 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북한 지도부의 위기감도 엿보인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2012년 4월 두 차례 발표한 노작(勞作)에서 “인민들의 식량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핵과 미사일 개발을 앞세운 ‘선군정치’를 고수하는 한 북한 주민의 주린 배를 채울 방법은 요원하다. 세 차례의 핵실험을 포함해 북한이 지금까지 핵개발에 쓴 비용은 총 65억 달러(약 6조6430억 원)로 추산된다. 현재 배급량 기준으로 북한 전체 주민의 8년 치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한 차례 발사에 3억 달러(약 3066억 원)가 들어가는 장거리 로켓의 개발비용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고수하면서 인도적 대북지원도 격감하고 있다. 한 손에 핵무기를 쥐고, 다른 손으로 식량지원을 요청하는 북한 정권의 이중적 행태에 넌더리가 난 국제사회의 지원이 크게 줄면서 세계식량계획(WFP)은 올 하반기부터 대북식량 지원 활동을 중단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책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001년 러시아 방문 때 “모두가 비난해도 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오판은 김정은 후계체제로 이어져 한반도의 반쪽을 기아와 사투를 벌이는 절대 빈곤국으로 전락시켰다. 먹는 문제 등 민생 해결과 개혁개방을 통한 정상국가화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북한 지도부가 더 늦기 전에 깨닫길 바란다.
윤상호 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