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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문병기]매뉴얼 딜레마

입력 | 2014-05-21 03:00:00


문병기 경제부 기자

얼마 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배에게서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제빵 기술을 배우러 떠난 그는 일본어에 까막눈인 자신의 좌충우돌 일본 적응기를 실감나게 풀어놓았다. 그중 재미있었던 것이 유학자금 일부를 펀드에 투자하기 위해 은행에 다녀온 일화다.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를 대동하고 은행 창구에 간 그에게 일본의 은행 직원은 펀드 투자설명서를 내밀었다. 후배가 투자설명서를 친구에게 대신 읽게 하고 돌려주자 그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투자설명서를 본인이 직접 읽어야만 펀드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사정을 설명해도 은행 직원은 펀드 가입 절차를 표시한 매뉴얼을 보여주며 버텼다. 결국 후배는 함께 간 친구가 한 줄씩 읽으면 뒤따라 흉내를 내 읽는 방식으로 설명서를 직접 다 읽고서야 펀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

흔히 일본을 ‘매뉴얼 국가’라고 부른다. 두루마리 휴지를 몇 칸 뜯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지 표시한 그림 설명서가 붙어 있는 공중화장실이 적지 않을 정도다. 일본의 공장에 가면 매뉴얼을 100% 따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력 10년 이상의 숙련 근로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철두철미한 매뉴얼에 대한 일본의 자신감에 흠집을 낸 것이 2011년 발생한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사고다. 당시 일본 정부는 매뉴얼에 없다는 이유로 바닷물을 끌어다 원자로를 냉각시키겠다는 현장 책임자의 보고를 받고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 사고를 키웠다.

매뉴얼은 과거의 사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식과 경험의 집약체다. 제대로 된 매뉴얼을 갖추고 사고가 났을 때 매뉴얼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대형사고는 매뉴얼에 적힌 대로 전개되지 않는 법. 사고 현장에서 매뉴얼이 항상 최적의 길잡이가 되지는 못한다. 이른바 ‘매뉴얼의 함정’이다. 결국 매뉴얼보다 중요한 것은 매뉴얼을 숙지하되 현장에 맞춰 응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국내 원전 당국 고위 관계자도 후쿠시마 사고 후 비슷한 고민을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매뉴얼이 잘 갖춰져 있는 일본에서도 그런 사고가 났는데 국내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아찔했다”며 “이 때문에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사고 대응을 자동화하는 방안도 고민했지만 결국 사람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의 한 원인으로 부실한 재난대응 매뉴얼이 꼽히면서 최근 각 부처와 산업계에서는 매뉴얼 정비에 한창이다. 일본 등 외국의 대응 매뉴얼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다른 국내 기관들이 만든 것을 베껴 급조한 재난대응 매뉴얼이 적지 않은 국내 상황을 감안하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회사는 안전에 대한 투자를 낭비로 받아들이고, 직원들은 ‘잘해봐야 본전’이라는 인식으로 안전 책임자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훌륭하게 매뉴얼을 만들어 놓아도 언제든 ‘인재(人災)’가 반복될 수 있다. 부디 정부와 기업들의 안전 강화 조치가 매뉴얼 정비에 그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문병기 경제부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