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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바지 義人의 한숨 “생계 막막한데 말도 못꺼내고…”

입력 | 2014-05-22 03:00:00

[세월호 참사]
사고 이후 생활고 닥친 김동수씨




‘파란 바지 구조자’로 알려진 김동수 씨가 세월호에서 45분간 승객을 구조한 뒤 오전 10시 20분경 마지막으로 어업지도선 고속단정에 승선하고 있다. 전남도 제공

“아직도 실종자들이 남아 있는데, 내 어려움을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어서….”

지난달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파란 바지(운동복) 구조자’로 알려진 김동수 씨(49·화물기사)는 19일까지 제주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김 씨는 21일 실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진도 팽목항과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자원봉사 활동으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다. 그는 단원고 학생 등 실종자를 더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사고에 따른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세월호 침몰 당시 김 씨는 선체 3층 화물기사 객실에서 쉬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중 헬기 소리를 듣고 오전 9시 35분 선체 4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3층에 있던 단원고 여학생들이 4층으로 올라오려다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선체가 53도나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 씨는 위기를 직감하고 주위의 커튼을 찢어 10m 아래로 내려 보냈지만 길이가 짧았다. 결국 그는 선체에 몸을 의지한 채 소방호스를 내려 보내 여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선수(배 앞) 쪽으로 이동해 3층 홀에 갇혀 있던 학생들을 구조했다. 그는 “부모의 마음으로 정신없이 끌어올렸다. 몇 명을 구조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소방호스를 타고 선체 내부로 들어가 ‘탈출하라’고 외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 많은 학생을 살릴 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사고 당시 구조자들은 헬기로 탈출했지만 김 씨는 배에 남았다. 오전 10시 15분, 선체가 110도 이상 기울면서 수영을 해 빠져나온 학생 등을 안전하게 끌어냈다. 세월호가 완전히 물에 잠기기 직전에야 어업지도선 고속단정에 올랐다. 45분간의 사투였다.

요즘 김 씨는 적잖은 고민에 빠져 있다. 구조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왼팔 부상이 악화돼 수술을 받았다. 게다가 세월호 침몰로 생계수단이던 4.5t 화물트럭을 잃었다. 차에 싣고 있던 건축자재 비용을 보상해야 해 생계가 막막한 상황이다. 사회단체 등으로부터 생활비를 일부 지원받는 게 전부다.

김 씨처럼 세월호 생존자 172명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호소하고 있다. 부상으로 생업에 지장이 생겨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적지 않다.

4.5t 화물차 차주인 정찬진 씨(51)는 “제주에만 피해를 본 동료가 20여 명이다. 각종 보험도 적용이 안 돼 힘들다”고 전했다. 소규모 건설업을 하는 강병기 씨(41)는 “이전에 수주해놓은 방파제 난간 보수 공사를 하지 못했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인천 용유초등학교 동창생 16명과 환갑 기념여행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 김정근 씨(60)는 갈비뼈 3개와 등뼈가 부러져 여전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목포=이형주 peneye09@donga.com / 주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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