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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정지은]인천 만석동 공부방 아이들로부터 받은 위로

입력 | 2014-05-22 03:00:00

모두 힘 모아 대본-소품 준비… 고사리손들이 올리는 인형극
믿음-화합의 공동체 기억 쌓고 관객들에겐 위안과 평화 선물
‘세월호’ 상처 입은 우리 사회… 인형극처럼 공동의 기억 만들어 함께 나눔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지은 사회평론가

‘공부방 식구들과 재미있게 논다.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귓속말 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곳, 평화가 필요한 곳과 친하게 지낸다.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으니까 심한 욕을 하지 않는다. 장난감이 없으면 우리 스스로 놀잇감을 만들어 재미있게 논다. 일 년에 한 번 오디션을 보고 공연을 한다.’ 이 원칙(?)들은 인천의 가난한 동네 만석동에 있는 기찻길 옆 작은 학교(공부방)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학교 공연의 중심에는 ‘칙칙폭폭인형극단’이 있다.

지금은 1년에 한 번은 정식 공연을 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이 인형극단의 출발은 소박했다. 자신의 마음을 잘 털어놓지 못하는 공부방 아이들이 친구들 앞에서 좀 더 쉽게 자신을 표현하는 놀이로 시작했던 것. 인형극의 매력에 빠진 아이들은 공부방의 이모, 삼촌들과 힘을 합쳐 인형극단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 극단이 춘천 인형극 경연대회에서 특별상과 대상이라는 큰 상을 연이어 수상한 것은 뉴스 축에도 못 낀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만든 인형극을 보는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위로받고, 다툼과 폭력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작은 평화를 나누는 순간이 훨씬 중요하니까 말이다.

공부방 식구들에게 인형극은 연례행사 그 이상이다. 매해 겨울이 오면 어떤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만들지 이야기하고, 주제를 정해 대본을 쓰고, 캐릭터에 따라 일일이 인형을 만든다. 얼굴에 한지를 발라 형태를 만들고, 색을 칠하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손이 안 가는 데가 없다. 복닥복닥 지지고 볶는 연습은 겨울 내내 이어진다. 뭐 하나 쉬운 건 없지만 봄이 되면 이 공연을 보러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이들은 즐겁고 기꺼이 이 소박한 공연을 나눈다. 그래서 이 공연은 하나의 행사로 끝나지 않는다.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은 작은 공동체의 기억을 잇고 서로의 삶 속에 새기는 일종의 제의다.

이들은 얼마 전 그림책 ‘6번길을 지켜라 뚝딱’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아이들이 함께 노래하고 놀고 공부하던 오래되고 작은 집 1층에서 만들어졌다. 인형, 배경, 소품, 사진까지 모두 공부방 식구들의 작품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삶터를 빼앗길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을 돕는 도깨비들의 이야기는 곧 만석동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4명의 20대로 이루어진 창작집단 ‘도르리’가 만들었다. 넷은 어렸을 때 작은 학교에서 만나 난타, 풍물, 노래를 배우며 자랐고 아이들과 인형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려왔다. 글을 쓴 김중미 이모와 사진을 찍은 유동훈 삼촌에게서 배우며 자란 제자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책을 낼 정도로 성장한 셈이다. 30쪽이 채 되지 않는 얇은 그림책이지만 담겨 있는 세월의 무게는 묵직하다.

4월, 세월호 참사가 있기 직전 관람한 그들의 무대 ‘길·동무·꿈’은 그래서 더 뭉클했다. 정성껏 만든 집게 인형을 품에 안고 “난 약하고 여린 내 모습 그대로가 좋아” 노래를 부르는 꼬마와 “돈이 좀 없어도, 여기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좋아요”라는 아이의 고백 앞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인형극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나와 한 몸이 된 짝을 믿고, 함께 연기하는 다른 사람을 믿고 가는 거다”라는 한 아이의 말처럼 앞으로도 이 작고 가난한 공부방은 인형극을 올리고 그림책을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전대미문의 참사가 모두의 마음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고 큰 충격을 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작은 공부방의 인형극처럼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함께 나누는 건 아닐까.

상처에서 돋는 새 살을 쓰다듬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지, 서로의 상처를 덧내며 뒷걸음칠지 선택은 모두의 몫이다.

우리가 이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와 기억은 달라질 것이다. 세월호가 ‘참사’와 ‘안전’이라는 키워드로 박제화되지 않고 성찰적 삶과 가치의 전환으로 나아가는 한편,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모두의 마음을 모을 때다.

정지은 사회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