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박목월(1916∼1978)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울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에바 아르미센의 ’가족의 초상’.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소소한 것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단점이 우리 삶을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는 거다. 멀고 어려운 곳에서 헤매느라 쉽고 가까운 행복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다.
엄마가 입원한 지 넉 달째, 주말은 둘만의 데이트 시간이다. 재활치료와 요양을 겸한 병원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말과 행동이 어눌한지라 표정 변화를 읽기 힘든데 가족이 다녀간 날은 단박 표가 난다. 얼굴은 환하고 눈빛이 또렷해진다. 이제 누군가의 엄마, 아빠로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에서 멀어진 어르신들은 신발 크기를 말할 때 ‘문수’란 단위가 익숙한 세대다. 그 주름진 얼굴들 위로 ‘청록파’ 박목월 시인의 ‘가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아홉 켤레 신발이 들려주는 흑백사진 같은 가족 이야기에 스페인 여성화가 에바 아르미센이 그린 알록달록한 ‘가족의 초상’을 맞물려 본다. 가족애를 화두로 한 글과 그림이 동과 서를 넘어 공명한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