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때 풋풋함 어디가고 “세월호는 광주” 등 연이은 실망스러운 행보 한국 정치에는 국가보다 진영과 정당이 먼저인가 앨 고어 같은 존경 받는 전직 후보를 보고 싶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그가 치렀던 대선은 2000년 11월 실시됐다. 개표 결과는 선거인단 수 266 대 271의 석패였다. 그러나 불과 537표의 차이로 선거인단 25명을 내줬던 플로리다 주에서 재검표가 이뤄질 경우 승부가 역전되는 상황이 전개됐다. 고어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들이 개표기의 판독 오류로 인해 무더기로 무효표로 집계됐기 때문이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재검표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고어 후보가 직접 썼다는 패배 인정 연설문은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저는 판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울러 저의 책무도 인정합니다.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많은 논쟁이 오가지만 일단 결과가 정해지면 승자나 패자나 받아들이는 것이 화합의 정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당이 지켜온 신념보다 더 귀중한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당보다 국가를 우선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깨끗하고 의연한 뒷모습’은 여기까지였다. 최근 그는 “세월호는 또 하나의 광주”라는 트위터 발언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4주년을 바로 앞둔 시점이었다.
‘안전사고’와 ‘민주화운동’이라는 다른 성격을 비교하는 엉뚱한 발상이 놀라웠다. 해당 트위터는 ‘광주 트라우마센터가 주최하는 오월 광주 치유 사진전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세월호는 또 하나의 광주입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문화행사를 널리 소개하기 위해 나온 돌출 발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틀 뒤 문 의원은 ‘죽지 않아도 될 소중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몬 점에서 광주의 국가와 세월호의 국가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를는지요’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진심이 담긴 발언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어 그는 세월호 참사를 놓고 박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는 특별 성명을 내놓았다.
앨 고어도 선거 이듬해인 2001년 9·11 테러라는 국가적 참사를 맞는다. 테러 발생 10여 일 뒤 연설에 나선 그는 경쟁자였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비상시 군통수권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부시는 나에게도 최고사령관”이라며 지지를 표시했다. 또 “미국이 지금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며 대통령과 여당인 공화당에 대한 비판을 삼갔다. 이후 그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해 200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문재인 의원은 세월호 발언 이후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를 주장하면서 일련의 발언들이 6·4 지방선거 또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위한 것임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 됐다. 이석기 의원으로 대표되는 통진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의식한 탓인지 “당과 당 연대는 곤란하지만 지역에서 후보 간 단일화는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 전 대통령 후보로서 1470만 표를 얻었던 인사가 내놓기에는 군색했다.
그래도 궁금증은 남는다. 정치에 물들지 않은 풋풋한 인상이 그의 강점이었던 대선 때를 떠올리면 납득되지 않는 점이 적지 않다. 현재의 실망스러운 모습은 이른바 친노로 불리는 진영 논리를 대변하기 위한 결과물인가. 한국 정치에선 국민적 위기를 맞아서도 국가보다는 소속 정당이나 이념이 먼저인가. 문 의원 이외에도 과거 대통령 후보들의 추락을 보면서 앨 고어 같은 쿨한 전직 후보를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인지 답답하고 부럽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