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1호를 만나다]<12>국립수목원 첫 수장 이유미 원장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고 묵묵히 일한 끝에 사상 첫 여성 국립수목원장이 됐다. 이 원장이 경기 포천시 광릉로 수목원의 울창한 숲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천=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곳은 500여 년의 시간이 쌓인 공간이기도 하다. 1468년 조선시대 세조 능림(陵林)으로 지정된 이후 잘 보존되어 2010년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보존지역으로 등재됐다. 이런 수목원에서 일하면 ‘궁극의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1년에 절반은 외박하는 여대생
이런 수목원에서 올해 4월 첫 여성 수장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이유미 수목원장(52). 그는 산림청 47년 역사상 첫 여성 고위공무원이기도 하다. 올해로 수목원에서 일한 지 20년이 된 이 원장은 대부분 고시 출신이 꿰찼던 수목원장 자리를 연구사로는 이례적으로 맡게 됐다. 연구사는 고시가 아닌 특채로 뽑는다. 그에게 ‘1호 수목원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봤다.
81학번인 이 원장이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여학생들 사이에서 전공 선택의 불문율이 있었다. 문과는 영문학, 이과는 식품영양학이나 가정학을 전공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임학과(현 산림자원학)를 택했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개척하는 재미가 없잖아요. 꽃을 좋아하는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정원에서 식물을 가꿨어요. 시장에서 씨앗을 함께 사다가 직접 심는 일이 즐거웠지요. 사촌오빠가 국립공원을 설계하는 직업도 있다고 귀띔해 줬어요.”
서울대 임학과 동기(45명) 중 여성은 이 원장 혼자였다. 임학과 60여 년 역사상 6번째 여학생이었다. 한라산부터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탐사해야 하는 특성상 여학생들이 꺼렸다. 1년에 절반은 집 밖에 있었다. 밤을 지새우는 게 다반사였고 10kg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는 등산도 잦았지만 그는 ‘날쌘돌이’로 통했다.
예컨대 식물을 찍는 카메라 렌즈가 클수록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들 수 있는 무게만큼 배낭에 넣었다. 산을 다니는 것이 힘들 법도 했지만 식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그는 식물분류학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소위 ‘뜨는 분야’는 분자분류학이었다. 식물의 DNA를 추출해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자. 반드시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선진국에서는 실험실 위주의 연구가 일반화됐지만 이는 식물 표본을 제대로 확보하는 등 기초가 탄탄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거죠. 한국은 식물 현황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은데 마냥 선진국처럼 연구할 수는 없었지요.”
오지에서 말 타고 희귀식물 캐온 근성
이 원장은 공무원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식물도감에서 봤던 희귀식물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고, 희귀식물 복원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장 수목원에 어떤 식물이 있는지 분포 현황을 조사하고 사라져 가는 걸 찾아내는 게 시급했습니다. 식물을 수목원에 옮겨서 증식하거나 현지에 보존하는 등 조치를 취하는 일을 서둘러야 했죠.”
그는 10여 년간 입소문을 추적하고 문헌을 뒤적이면서 희귀식물을 찾아 헤맸다. 이른바 ‘숨은 식물 찾기’였다. 어떤 식물이 ‘30여 년 전에 설악산 골짜기에 있었다’는 말만 듣고 찾아 나서면서 길을 잃는 등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매화마름. 도감에 따르면 매화꽃처럼 생겼는데 물가에 사는 잡초인 매화마름이 멸종됐다고 했다. 하지만 해안가 인근 주민들에게 묻고 고문헌을 뒤적인 결과 해안가의 논에 서식하는 물풀을 찾아냈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네가 여기 있었구나, 사람들이 너를 못 알아봤구나, 반갑다’라고 인사했지요. 식물은 산에 있다는 상식에 따라 식물을 찾으러 깊은 산에만 갔지, 바닷가 근처로 갈 생각을 못했던 거죠. 바닷가 논은 예상 밖이었어요. 물부추 등 비슷한 물풀도 줄줄이 찾아냈어요.”
해외에서 희귀식물을 캐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물사리와 검은낭아초 등을 ‘동토의 땅’으로 유명한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 채집하러 갔을 때다. 이 식물이 있다는 산에 도착해보니 산불이 나 있었다. 허망했다. 대신 맞은편 큰 산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원은 ‘도로가 없기 때문에 교통수단은 없지만, 주민들이 종종 말을 타고 간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말을 구해달라고 했고, 탐사단 모두 각각 말을 타고 달린 끝에 식물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 원장은 ‘식물 전문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5년차 연구사였을 때 대통령이 수목원을 방문하면 직접 수목원의 식물들을 안내하는 등 식물에 대한 해설은 이 원장이 도맡았다. 특히 그는 희귀식물을 복원하면서 식물표본을 확보하는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식물표본은 생물주권과 직결되는 ‘보물’과도 같은 기록인데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기존에는 대학마다 표본실이 있었는데 기초 학문이 약화되면서 줄어들었죠.”
수목원은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전환하면서 당시 2만여 점에 그쳤던 식물표본을 2020년까지 미국의 국립수목원 수준(60만여 점)으로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현재 식물표본을 80만여 점이나 확보했을 정도로 빨리 목표를 달성했다. 또 그는 식물뿐 아니라 곤충 등 생물까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표본을 확보해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www.nature.co.kr)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현재 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GBIF)에 등재된 정보의 70% 이상을 제공한다.
이 원장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나무 백 가지’, ‘광릉숲에서 보내는 편지’, ‘내 마음의 야생화 여행’ 등을 펴내면서 식물 지식을 대중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학생들은 생물 과목을 따분하게 생각하지요. ‘종속과목강문계’만 달달 외웁니다. 하지만 식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생물체로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저에게도 식물은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책을 쓰면서 식물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지요.”
그가 책을 펴낸 건 지금은 폐간된 잡지인 ‘샘이 깊은 물’에서 식물에 대한 원고 청탁을 해온 게 계기가 됐다. 식물 한 개당 원고지 40매를 쓰는 일이었다. 자료가 많지 않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이 원장은 탐사 갔을 때를 떠올리면서 식물에 대해 온전히 사유했다. 이후 강연을 통해 식물과 숲과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등을 알렸다.
스토리텔링으로 식물학 대중화
“계절이 바뀌면 설악산 자락 어딘가에 펴 있을 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마음이 두근거려요. 자연은 무궁무진합니다. 20년째 수목원에 출근하면서 한 번도 똑같은 느낌을 지닌 적이 없어요.”
이 원장에게 숲과 식물은 인생 그 자체다. 남편은 서울대 임학과 81학번 동기인 서민환 박사(52)로 환경부 산하 국립생물자원관 생물자원연구부장(고위공무원)이다. 서 박사는 산림생태학을 공부해 이들은 ‘부부 숲 박사’로도 통한다. 남편이 숲 전체를 연구했다면, 이 원장은 나무나 식물 하나하나를 공부한 셈이다.
석사 과정 때 이 원장의 지도교수가 내준 과제가 부부의 연을 맺어줬다. ‘아까시나무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꿀의 생산량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연구하라.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등 하루 4차례씩 아까시 꿀을 채취해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밤중에도 말없이 산행을 함께 해준 게 서 박사였다. 이후 이들은 데이트도 산에서 했고 신혼여행 때도 숲을 둘러봤으며 이 원장이 임신 9개월일 때까지 함께 식물 탐사를 했다. 또 ‘쉽게 찾는 우리 나무’라는 책을 부부가 같이 펴내기도 했다.
이 원장은 “수목원을 식물 산업과 기초 생물학의 연구 플랫폼으로 만드는 동시에 각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위안을 받거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수목원 입장은 예약제로 가능한데, 몇 달을 통째로 예약해 주기적으로 오는 부부가 있어요. 하루는 전나무 숲만 거닐며 바람을 맞을 수 있고, 또 하루는 연못 앞 벤치에 앉아 수생식물과 새들만 지켜보는 거죠. 수목원이 천 가지의 표정을 지녔다면 수목원을 즐길 수 있는 방법 역시 천 가지예요. 멈춰 서서 식물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포천=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