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간호조무사 1명뿐… 잠자던 노인들 꼼짝 못하고 참변

입력 | 2014-05-29 03:00:00

[장성 요양병원 참사]
한밤 검은 연기에 속수무책




CCTV에 찍힌 방화 용의자 경찰이 방화 용의자로 지목한 치매환자 김모 씨(점선 안)가 28일 새벽 발화 장소인 3006호를 빠져나오는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화면. CCTV에는 시간이 0시 23분 22초로 찍혀 있지만 2분이 빠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0시 21분 22초다. 전남 장성경찰서 제공

“불이야!”

28일 0시 24분 전남 장성군 삼계면 소재 효실천사랑나눔(효사랑) 요양병원 별관 2층 3006호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병원 별관 1, 2층에는 총 78명의 환자가 있었고 대부분은 잠을 자고 있었다.

본관에 있던 간호사가 비상벨 소리를 듣고 0시 27분 소방서에 신고했다. 0시 31분 소방대가 현장에 도착해 2분 만에 큰 불길을 잡았지만 입원 환자 20명과 간호조무사 1명이 숨지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고령에 치매를 앓던 노인들이 수면 중 유독가스를 피하지 못해 인명 피해가 커졌다.

○ 치매 노인들 잠자다 그대로 질식

사망자 21명(남성 16명, 여성 5명)은 모두 환자 34명과 간호조무사 1명이 있던 별관 2층에서 나왔다. 소방관들이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간호 접수대까지 밀고 나온 뒤 환자를 업고 빠져나오길 되풀이했지만 모든 환자를 구하지는 못했다.

별관 2층에 진입해 환자들을 구출한 한 소방관은 “환자 7명은 자력으로 탈출했고, 일부는 구조됐지만 주무시고 계셨던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미처 연기를 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사히 대피해 목숨을 건진 한 환자는 “저녁에 수면제를 처방받아 먹은 사람들은 못 빠져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고령 사망자는 92세의 양의묵 할아버지이고 80대 사망자도 5명에 이른다.

병원 측은 화재 당시 2층에 간호사 1명과 간호조무사 1명 등 2명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간호조무사 1명만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야간에 간호조무사 1명이 수십 명의 환자를 돌보도록 한 조치가 적절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유사시에 환자들을 모두 대피시키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 간호조무사는 홀로 불을 끄려다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1층에 있던 환자 44명은 모두 구조됐다. 별관 1층에 있던 환자 이채규 씨(71)는 “자다가 ‘불이야’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우르르 병실을 빠져나갔다”며 “연기가 가득 차 있어서 벽을 손으로 더듬으면서 뛰어나왔다”고 말했다. 탈출한 환자 김재후 씨(70)는 “원래 병실 문은 잠겨 있다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고 말했다. 화재 뒤 1층 근무 간호사가 문을 연 것으로 추정된다.

15명의 병원 본관 근무자는 119구조대, 경찰과 함께 환자를 구조하고 본관 앞마당에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유독가스에 질식해가는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별관 2층에 들어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병길 장성소방서 소방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비상벨 소리에 뛰어나와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별관 2층에 들어가서 환자를 데리고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사고 초기 ‘일부 환자의 손이 묶여 있어 대피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경찰은 감식 결과 그런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병원 측의 과실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 소방점검과 근무기록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이날 신청했다.

○ 치매 환자가 유력 용의자

경찰은 별관 2층에 입원해 있던 환자 김모 씨(82)를 유력한 방화 용의자로 보고 장성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김 씨를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별관 2층에 설치돼 있는 폐쇄회로(CC)TV에는 화재 3분 전 김 씨가 처음 화재가 난 3006호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이 촬영돼 있었다. 경찰은 김 씨 외에는 이 시간대에 복도에 나온 환자가 없다고 밝혔다. 김 씨는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뇌경색 증세로 1일 이 병원에 입원했으며 치매 증세도 있었다.

CCTV 화면에서 김 씨는 담요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0시 15분경 자신의 병실인 3002호에서 나와 0시 16분 42초 화재 발생 장소인 3006호에 들어갔다. 5분 뒤인 0시 21분 30초경 3006호에서 나올 때는 빈손이었다. 그리고 약 3분 뒤인 0시 24분에 불길이 올랐다. 화재 현장에서는 라이터의 잔해가 발견됐다. 김 씨가 라이터를 갖고 들어간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3006호는 침대나 이불 등을 쌓아 놓는 창고로 쓰였다”며 “어디에 불이 붙으면서 화재가 시작된 것인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방화 혐의를 부인했다. 김 씨는 관련 전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의사 자문 결과 김 씨의 증세가 심하지 않아 혼자서도 조사를 받을 수 있는 상태인 것으로 판단하고 심적 안정을 취하게 하고 방화 여부를 규명할 방침이다.

○ 일주일 전 점검에는 “이상 없음”


최근 이 병원에 대해 안전 점검이 두 차례 이뤄졌지만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가 나와 점검이 부실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남도가 세월호 참사 이후 위기 관련 매뉴얼 현장 작동 여부 점검을 지시하자 병원 측은 소방설비 구비 여부 등을 자체적으로 점검한 뒤 9일 장성군에 “이상이 없다”고 보고했다. 장성군도 21일 직원들이 현지 점검을 했지만 별다른 이상을 확인하지 못했다.

또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야간에 요양병원은 환자 200명이 넘으면 당직 의사를 최소 2명 배치해야 하지만 이 병원은 환자가 324명이었음에도 사고 당일 밤 당직 의사를 1명만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장성=조종엽 jjj@donga.com·권오혁
광주=박성진 기자

사망자 명단 (21명·가나다순)

△기세영(75) △김귀남(53·여) △김영례(74·여) △김재명(82) △김종만(51) △박기녀(88·여) △박의웅(77) △박인귀(75) △박종신(85·여) △안종길(81) △양의묵(92) △유재복(58) △이복순(76·여) △이상규(62) △이순열(72) △이순응(67) △임동운(62) △장이식(53) △정윤수(88) △최병섭(70) △홍기광(71)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