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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횡포 막겠다는 꺾기 규제, 되레 기업활동에 걸림돌

입력 | 2014-05-30 03:00:00

[SOS 청년일자리, 규제개혁단이 간다]
中企-창업자 울리는 ‘탁상 규제’




경기 화성시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모 씨는 최근 은행에 대출만기 연장을 요청했다가 큰 불편을 겪었다. 은행 측이 모든 등기임원에게서 개인정보 조회를 위한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렵게 전체 등기임원들로부터 동의서를 받아 제출했더니 이번에는 비상근 등기임원 중 한 명이 예금을 했다며 문제를 삼았다.

은행 측은 “대출 앞뒤로 한 달간 대표이사나 등기임원이 예금에 가입하면 ‘꺾기(구속성 예금)’로 간주돼 처벌을 받는다”며 대출조건으로 예금 해지를 요구했다. 김 씨는 “일일이 동의서를 받는 것도 모자라 멀쩡한 예금까지 해지하라고 설득하느라 곤혹스러웠다”고 하소연했다.

정부가 중소기업 육성과 창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정작 수많은 중소기업과 창업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규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 금융질서를 바로 세우고 유망 기업을 지원하겠다는 선의(善意)의 규제들이 현장에서는 기업 자금줄을 막는 걸림돌로 전락한 것이다.

○ 기업 현실 외면하는 창업규제

정부는 올 3월 은행의 횡포를 막겠다며 ‘꺾기’ 관련 규제를 강화했다. 대출받은 기업의 대표나 등기임원이 대출 전후 한 달간 해당 은행의 예금, 펀드, 보험 등에 가입하면 꺾기로 판단해 처벌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법인명의 가입만 금지했지만 최근에는 기업 대표 및 등기임원으로 대상이 넓어졌다.

정부가 중소기업을 돕겠다고 만든 이 규제는 오히려 기업을 힘들게 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주거래은행에서 급하게 몇 백만 원의 운전자금을 대출받거나 기존 대출을 연장할 때마다 모든 등기임원을 쫓아다니며 일일이 개인정보 조회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또 해당 은행에 등기임원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한 금융상품까지 손해를 감수하며 해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오히려 일부 은행은 당국의 어설픈 꺾기 규제를 교묘히 피해 비등기 임원이나 직원을 대상으로 금융상품 가입을 강요하는 ‘신종 꺾기’에 나서고 있다.

한쪽에서는 유망 창업 기업이라고 지원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이유로 부실 낙인을 찍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진다. 2010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업체 A사를 창업한 최모 씨는 지난해 산업기술평가원에 연구개발(R&D) 자금 지원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A사가 재무제표상 자본금이 바닥난 완전자본잠식 상태라 신청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전환사채(CB) 형태로 투자받은 자금이 회계장부에 ‘대출’로 처리되면서 A사는 졸지에 장부상 빚더미에 앉게 됐다. 최 씨는 “지원을 받았다면 직원을 늘려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겠지만 현재는 직원 월급 주기도 벅찬 실정”이라고 말했다.

허영구 벤처기업협회 정책연구팀장은 “일률적 회계기준으로 신청자격을 제한하는 대신 자본잠식이나 높은 부채비율의 사유를 따져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면 창업 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규제 해소하면 2만6000여 개 벤처 일자리 창출

금융지원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하는 복잡한 서류도 청년창업자들에게는 넘기 힘든 사실상의 진입 규제다. 지난해 학내 창업을 한 대학생 김준길 씨(25)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고용지원금을 받기 위해 근로계약서, 졸업증명서, 주민등록초본, 자격증 사본, 사업자등록증, 최근 3년간 결산재무제표 등 10개 이상의 서류를 내야 했다. 김 씨는 “어렵게 서류를 냈더니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졸자 기준 임금 월 100만 원만 지원받았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 많은 서류를 받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업 생태계에서 벤처기업은 ‘고용창출의 보고(寶庫)’다. 중소기업청과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기업(총 2만8135개)은 1곳당 평균 2.8명의 인력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벤처기업 중 올해 신규인력 채용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58.7%. 이들만 계획대로 채용에 나서도 연 2만6400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규제 환경에서는 청년창업을 활성화하거나 이를 통한 일자리를 창출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창업자들은 은행들이 좀처럼 없애지 않고 있는 연대보증제도나 재기 창업자를 금융거래 대상에서 원천 배제하는 은행 내규, ‘제조업 5000만 원, 지식서비스 3500만 원’ 식으로 지원금을 못 박은 중소기업청의 창업선도대학 지원 등을 현실을 외면한 대표적인 제도로 꼽는다.

정현숙 한국무역협회 연구위원은 “수백 개의 창업 지원제도가 시행기관 사정에 따라 제각각 운영돼 청년창업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창업자의 눈높이에서 수요자를 위한 원스톱 인프라를 구축하고 현실에 맞게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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