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걸려 치과용어 16만개 정리… 이 악물고 했죠”
40여 년에 걸쳐 치의학사전을 편찬한 이병태 박사. 그의 사무실 뒤 벽면에 그동안 그가 정리해 온 단어 설명 카드가 빼곡하다. 그는 각종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할 때면 늘 새로운 단어에 귀를 기울여 왔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 박사는 단어카드를 일일이 손으로 작성했다. 진료시간 틈틈이 작성하기도 하고 퇴근 후 집에서는 엎드려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가기로 했던 부부 동반 여행에도 빠지면서까지 매달린 작업이었다. 행여 힘들여 작업한 단어카드를 분실할까 봐 이를 복사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치과의원, 자신의 집, 경기 김포에 있는 자신의 농장 등 3군데에 분산 보관했다. 조선시대에 국가문서인 실록(實錄)을 전국의 사고(史庫)에 분산 보관했던 일을 떠올리게 할 만큼 신중했다. 손으로 원고 작업을 마친 뒤 이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입력 전담 직원을 고용했다. 1, 2년 일하다가 떠나간 직원만 6명에 이르렀다. 그 사이 치과계의 새로운 흐름 속에 계속 생겨난 단어들을 정리하느라 작업량은 늘어만 갔다. 그러자 아들이 본격적으로 가세했다. 치의학 및 의학 용어가 주로 실려 있지만 한의학, 약학, 생물학, 물리학을 비롯해 치의학과 관련된 역사 철학 문학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단어들도 실었다. 또 용어 설명이 다음 줄로 넘어갈 때 용어나 단어가 중간에서 꺾이지 않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이재일 서울대 치의학대학원장(53)은 이번 사전에 대해 “기존 사전들에 비해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국내 최초의 한국어 치의학사전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부터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이뤄낸 의미 있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우리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봉사 정신이 없었다면 이런 사전을 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긴 작업을 끝마친 뒤의 느낌은 후련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홀가분하고 뿌듯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해야 할 뒷일이 또 생겼어요.” 이 박사는 사전이 나오자마자 사전의 보완 작업에 눈길을 주고 있다. 알파벳 순서대로 수록된 단어들을 가나다 순서대로도 찾아볼 수 있도록 새로운 한글 인덱스를 덧붙일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을 마치려면 또 2, 3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예상이다.
그가 치의학사전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낀 것은 1960년대 초 서울대 치대에 다니던 시절부터였다. “교수님들이 일본과 독일의 원서를 요약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쓰기 바빴다. 책방에 돌아다녀도 과학사전이 안 보였다. 1964, 65년경 미국에서 발간된 원서를 보기 시작했는데 단어에 막혀 진도가 안 나갔다. 그때 치의학사전이 없는 게 원통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사전을 펴내기로 결심한 것은 1970년대 중반쯤이었다. 그는 1976년 서울대에서 치과보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전 3년간 준비해 박사학위를 받을 때 ‘치과보철기공학’이라는 책을 냈다. 미군들이 쓰는 치과 매뉴얼을 참고한 뒤 이를 번역 보강해 각종 자료와 사진을 넣고 펴낸 책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한옥을 팔아 출판 비용을 댔다. 전국의 치대생이 몇 명 되지 않는 시절이어서 책을 낸다고 해도 팔리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결혼해서 자녀까지 있는 상황에서 돈 안 되는 일을 하자 주변에서는 “미쳤다”고도 했다. “젊었을 때였죠. 열정이 있던 때였습니다. 돈은 없다가도 생기지만 이런 일은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는 못할 거 같더군요. 그 대신 이후로 집사람한테 꼼짝 못했지. 하지만 그 돈 가지고 딴짓한 건 아니니까….”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치과용어 중에 우리말이 매우 적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다. “예를 들면 치과에서 쓰이는 금속 광택제 중에 ‘루주(rouge)’라는 게 있어요. 산화철이 들어 있는 적색 분말인데 이 용어를 처음 듣는 직원은 입술에 바르는 루주인 줄 착각하고는 하지요. 이런 간단한 단어들도 설명하는 게 힘들더군요.”
만화가인 고 길창덕 화백이 이병태 박사에게 그려준 그림. 이 박사는 치과의원을 운영하며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아들 이창규 박사는 임플란트 분야를 비롯해 치과계의 최신 용어를 정리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께서 사전 편찬을 위해 단어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집에는 항상 아버지가 만든 단어장이 ABC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치대생(경희대)이 되면서부터 아버지께서 치의학사전을 위해 단어장을 만드는 것을 거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전 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나 같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표현하면서 “끝까지 사전 작업을 마치신 데 대해 아들로서 후학으로서 존경스럽다. 앞으로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거나 사전 증보판을 내는 것은 아들인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전을 편찬할 때 이 박사와 이창규 박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다른 아들들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환경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학박사인 큰아들 이일규 씨(46)는 바이러스와 관련된 용어들을 정리했다. 이번 사전을 펴낸 출판사 대표인 막내아들 이영웅 씨(42)는 책의 편집과 출간 마무리 작업을 맡았다. 사실상 온 가족이 이번 사전에 매달린 셈이다.
이병태 박사는 사전 작업을 하면서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2001년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창립 공동대표가 되어 이후 2010년까지 69차례에 걸쳐 북한에 가서 진료봉사활동을 펼쳤다. 1990년부터는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를 방문해 진료봉사활동 및 각종 시설 지원을 했다. 그는 1997년부터 옌볜조선족자치주 제2인민병원 명예원장을 맡고 있다.
치의학사전을 함께 펴낸 아버지 이병태 박사(오른쪽)와 아들 이창규 박사. 치의신보 제공
그러나 그는 1994년 아픈 시기를 겪었다. 당시 서울대 치대 산악회 재학생 및 졸업생 회원과 함께 미국 요세미티 등반에 등반대장으로 나섰는데 이때 대원 두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당시의 아픔과 관련해 “음식도 들어가지 않고 소변도 나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 일은 그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고 이후 그가 방송 출연 등을 그만두고 사회봉사활동 쪽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다.
그는 평생 산을 좋아해 산과 관련된 글도 많이 썼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의 모임인 ‘산서(山書)’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전 편찬 작업과 등산은 닮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꾸준함과 인내다. 그는 가훈을 ‘끊임없이’로 정했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한발 한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기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결국 치의학사전은 그가 일생을 통해 오른 인생의 산이었다. 그것은 포기할 줄 모르는 정신의 산물이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